보물 제442호인 관가정
넘어졌지만 오랜 세월을 버텨온 향나무 뿌리
관가정 향나무
문인화를 그리는 손수용 화백을 만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경주 손씨인 그가, 양동마을에 손씨 입향조 계천군 손소(孫昭,1433 ~1484 )가 심은 큰 향나무가 있다는 것을 제보했기 때문이다. 역사속의 인물과 관련된 나무를 찾아다니고 있는 나로서는 귀가 번쩍 뜨일 일이었다. 언젠가 찾아가서 500여년을 버텨온 나무를 보는 기회를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운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친구 이한근 군과 절친한 조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분의 형이자 나의 직장 선배이기도한 조병철 님의 영덕 농장을 구경 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한근 군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몇 번 만난일이 있었고, 내가 존경했던 선배님의 아우라 언제 한번 형이 마련한 농장을 함께 가자고 한 일이 있었는데 그 것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내일 이행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입원하고 있는 김천 남면의 모 요양원을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잊지 아니하고 있다가 챙겨준 성의가 고마워 그러자고 승낙했다. 참으로 고맙게도 다음 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차를 몰고 왔다. 성서 모 할인점 앞에서 한근 군과 동승 대구, 포항 간 고속도로를 타고 목적지에 닿으니 정오가 약간 넘었다. 동해의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이미 같은 직장 선배 두 분이 부부와 같이 와 있었다. 세월에 맞서는 장사 없다더니 위엄 있고 정열이 넘치던 옛날 그 분들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늙은 표가 역력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근황을 물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조 선배님이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마련해둔 자연산 물고기의 회 맛은 일품이었다. 사실 내가 조 국장에게 그 곳을 가보자고 한 이유는 선배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내가 대구수목원 책임자로 있을 때 선배에게 준 나무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마음도 컸었다. 회를 먹고 주변을 살펴보니 많이 얻어 갔다싶은 개나리는 별로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이른 봄에 움이 돋는 귀룽나무만 새잎을 뾰족이 내밀려하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물을 제때 주지 않는 것과 배수불량 때문에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싹이 튼 나무가 동해안을 굽어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모습이 대견했다. 선배들은 고로쇠나무 물을 먹으로 어디론가 가고 우리 역시 돌아오려고 했다. 나는 조 국장에게 시간도 있고 하니 이왕이면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집성촌인 양동마을을 한 번 둘러보고 가자고 했다.
모두들 그러자고 하여 차를 몰았다. 경북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마을로 알려진 안동의 하회와 성주의 한개마을을 가 보았지만 고풍스럽고 마을이 크기는 이 곳이 더한 것 같았다. 또한 평지인 하회와 약간 경사지긴 하지만 한 곳에 건물이 집중되어 있는 한개와 달리 평지와 양 언덕으로 마을이 3분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초가가 많은 것이 조선시대의 어느 곳을 거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손소가 심었다는 향나무를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언덕에 있는 집 입구에 큰 향나무가 있어 그 나무려니 하고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에게 여기가 손씨의 종가집이 맞느냐 했더니 아니라며 내려가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라고 했다.
알려준 대로 왼쪽으로 들어가 비탈면을 올라가니 큰 고가들이 여러 채 있었으나 문제의 향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왼쪽의 언덕을 헐레벌떡 올라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와 보았다는 친구 이군은 아예 따라오지도 않아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것 미안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동행한 조 국장에게 몇 군데만 더 가보자고 하여 향단을 거쳐 마지막 들린 곳이 바로 손소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조 문신이었던 손중돈(1463~1529)이 1480년대 분가해 살았던 관가정(觀稼亭)이었다. 높은 곳에 위치해 안강의 넓은 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보물 제 442호로 지정된 정자도 아름다웠지만 그보다는 정자 왼쪽 축대위에 심어졌으나 언제가 넘어져 꾸부러진 채로 자라는 오래된 향나무가 나를 감동시켰다. 비록 손소가 심었다는 나무는 아니지만 어쩌면 우재(愚齋, 손중돈의 호)가 분가해 나올 때 아버지 손소가 심은 나무의 씨를 받아 심었거나 아니면 가지를 삽목 해 심은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도 저도 아니면 굵기 등으로 보아 어떤 경우이던 우재의 손길이 닿은 나무일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489년(성종 20) 대과에 급제한 우재는 내직에 있을 때도 정사를 바르게 본 분이지만 연산군의 횡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중종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한 그가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펼치자 고을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살아있는 그 분의 사당(祠堂)을 세울 정도로 훌륭한 목민관인 분이었다. 그 후 공조·이조판서를 거쳐 도승지, 대사간, 경상, 전라, 충청,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을 역임한 청백리이다. 특히, 생질인 회재 이언적선생에게 많은 감화를 주어 훗날 회재가 동방오현에 드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런 그 분의 채취가 스며있는 향나무 또한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거듭 말해서 비록 손소가 심은 향나무 보기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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