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100년의 기다림

이정웅 2009. 12. 11. 21:50

100년의 기다림
 
 
 
전통이 전무한 곳에서 혼자 세계적 왕국을 짓는 소녀가 있다. 그녀가 확 퍼지는 음률에 맞추어 스파이럴 팔을 벌리면 마치 빙상 위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여왕은 우승의 첫 번째 기쁨을 자신의 코치 브라이언 오서라는 외국인과 같이 듣는다. 물론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는 스포츠들은 거의 우리 전통의 경기가 아니다. 피겨스케이트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90년대였다. 우리나라에 나와 있던 외국인들은 ‘빙족희’(氷足戱)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시고 경복궁 향원정에서 시범공연을 했다. 황후는 내외의 법도를 지켜 발을 치고 뒤에서 구경했는데, 남녀가 함께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데에 못마땅해 했단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강에서 열리는 스케이트 대회를 참관했다. 그때 대통령 내외는 의자를 놓고 앉아서 무릎에 담요를 덮고 있었다. 선수들 중에는 평상복으로 스케이트를 신고 나온 이들도 많았다. 그 뒤 또 50년, 애호가들에 의해 맥을 이어오던 우리의 피겨스케이트가 김연아를 따라 세계의 주목을 끌어들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전통이 창출되는 현장에 있다.

물론, 이 전통은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세계이다.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인터넷 동영상을 찾다 보면 한국인 해설보다는 일본어나 러시아어 해설 동영상이 많다. 게다가 한국 해설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다시 되뇌고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외국은 작품 해설에 있어 우리보다는 한 단계 앞선다.

김연아가 본드걸 쇼트프로그램을 처음 연기할 때 일본 해설자는 그가 자신의 최고점에 근접하리라는 예상을 했다. 해설하면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수준이다. 러시아 해설자들은 시합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는 경지에 있다. 지난번 프랑스에서 치러진 프리스케이팅 연기롤 보면서 한 러시아 해설위원이, “나는 오드리 헵번이 생각납니다”라고 하자, 상대편이 대답했다. “김연아는, ‘아니에요. 이게 바로 나예요’라고 연기하고 있는데요”라고 덧붙였다. 이 해설을 들으면서 우리의 피겨스케이팅이 얼마나 척박한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새로운 현대 세계를 찾아다닐 때 또 다른 100년의 기다림을 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전통을 이고,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는 동네에서, 모두가 속도감과 편리성을 찾아 사고방식까지 전환하고 있을 때, 묵묵히 400여년 된 집을 지키고 살고 있었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트 날 위에 서서 온몸을 긴장하듯, 하늘과 역사를 이고 절제와 격조를 위해 긴장해 온 사람들이다. 바로 종가(宗家)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준비된 전통’이다.

종가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영남 지역이다. 이곳에는 약 260여 종가들이 있다. 올해 경상북도 도청에서는 이곳에 기울였던 관심을 ‘종가문화 르네상스 원년 선포’로 표출했다. 봄`가을 두 차례 종가 포럼을 했다. 종가도 이 관심에 응답하며 그동안의 침묵을 털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어느 종손이 말했다. “60년대, 70`80년대는 산업화하느라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잖아요. 그동안 늘 안사람에게 미안했어요. 그랬는데, 요즈음 종가 포럼 등으로 집사람 입꼬리에 웃음이 달린 것이 고마워요.”

지금, 관(官)과 학계, 사회에서는 각종 종가 문화 관련 모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근대 100년을 지킨 종부들, 문밖을 나서는 반가 음식, 종가 브랜드화, 종가별 문장 제작 등 다양한 사업들이 전개된다. 물론, 스포츠 선수가 외국까지 전지훈련을 나가듯, 이 모든 사업은 준비된 계획과 차분한 실천이 필요하다.

창조란 그 사회의 여력이 한 사람을 통해서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피겨스케이트의 우아하고 종합적인 경기는 대한민국의 삶이 이제 그 수준에 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 시민들도 양반 문화의 여유를 누릴 경제적 여력도 있다.

100년에 걸친 근대화 건설 과정에서 종부 문화는 100년간의 고독으로 다져져 왔다. 이 근대 문화에 전통 문화를 입히면 한국이 뿜어내는 신비는 어느 누구도 입다물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면 자연과 조화되는 삶, 인간애가 살아있는 삶, 품격 높은 예술을 지향하는 우리의 새로운 문화는 미래의 삶에 대한 대안으로 온 인류에 답하는 문화가 되리라.

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2009년 12월 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