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남양주 풍양조씨 시조묘

이정웅 2010. 2. 7. 17:51

남양주 풍양조씨 시조묘
구불구불 내려뻗은 來龍脈 기세 일품…묘 뒤에 光海君의 어머니 공빈김씨 묘
 
 
 
성묘에서 바라본 내룡맥. 살아있는 뱀이 기어가는 듯 힘차다. 마주보이는 앞산에 광해군의 묘가 있다.
 
조맹 묘 전경. 튼실한 입수처가 돋보인다. 뒤에 보이는 곡장을 두른 묘가 성묘다.
풍양조씨 시조묘=풍양조씨 시조 조맹(豊壤趙氏 始祖 趙孟)의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다. 조맹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할 때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이름도 왕건이 하사한 것이라 한다. 조선후기 세도정치로 유명한 풍양조씨의 시조가 된다. 묘 바로 뒤에 광해군(光海君)의 어머니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묘인 성묘(成墓)가 있으며, 맞은편 산에 광해군의 묘가 있다. 들머리 산자락 너머에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의 영면처인 사릉(思陵)이 있다.

조맹의 묘 바로 뒤엔 곡장(曲牆)을 두른 왕실의 묘가 있다. 거대한 민간의 묘와 곡장을 두른 왕실의 묘,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형상이다. 일반적으로 왕실의 묘가 입지하는 곳엔 일정한 거리 내의 민간 묘는 이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선 아니다. 짙은 송림을 울타리로 삼아 공존한다. 묘한 조화다.

성묘,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김씨의 유택(幽宅)이다. 광해군이 제위에 올랐을 때 성릉(成陵)으로 승격되기도 했던 묘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나자 다시 격하되기도 했던 사연이 많은 묘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아래 조맹의 묘도 우여곡절을 격을 수밖에 없었다. 두 묘에 얽힌 사연, 한 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유택이 이곳 조맹의 묘 뒤로 정해진다. 조씨 문중의 반대가 거셌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다.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다. 광해군은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릉(陵)으로 승격시켰다. 일대가 성역화 된 것이다. 당연히 민간의 묘는 이장되어야 했다. 다행히 대신들의 반대로 이장은 면했다. 그러나 봉분은 깎인 채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된다. 성릉도 다시 성묘로 격하되었다. 이번엔 조맹의 묘가 복원된다. 후손들이 인조에게 호소하여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조맹의 묘와 성묘, 격변기 역사의 흐름처럼 희비가 엇갈린 셈이다.

조맹의 묘는 보국도 보국이지만 내룡맥의 기세가 백미다. 강하게 몸을 비틀며 들어오는 내룡은 힘, 그 자체다. 보통 살이 오른 용맥은 힘이 떨어진다. 그러나 여기선 마디까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친다. 작은 언덕으로까지 묘사되는 튼실한 입수도두에 속기(束氣)도 확실하다. 이만한 기세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아한 주산에 용이 가지고 논다는 여의주처럼 동그스레한 안산도 일품이다. 용트림하는 용맥과 여의주를 합쳐 비룡농주형(飛龍弄珠形)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주변 산들에서도 험한 곳은 찾아볼 수가 없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살(殺)을 털어버린 부드러운 산세다. 좌우전후 산봉우리엔 붓끝 같은 문필봉, 노적가리 같은 부봉에 벼슬을 상징하는 귀봉이 줄을 선다. 부귀를 향해 질주하는 천마(天馬)의 모습도 보인다. 짜임새 있는 보국에 적당히 솟고 꺼진 귀사(貴砂)들이 귀함을 더한다. 이에 걸맞게 조맹의 묘는 조선 8대명당에 거론되는 명묘(名墓)다.

들머리 부근엔 또 하나의 슬픈 역사 현장이 있다. 사릉이 그것이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잠든 곳이다. 정순왕후는 작은 아버지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지아비를 한평생 그리워하며 살다간 통곡과 눈물의 여인이다. 능호도 적절히 사릉이다.

조맹의 묘 앞산에 비운의 왕 광해군의 묘가 있다. 역사야 어찌됐건 젖먹이일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아들이 죽어서나마 품에 안겨있는 셈이다. 이것은 지모(地母)가 맺어준 포근한 인연이 아닐까.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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