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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중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면서 국군이 북한군에게 밀려 계속 남으로 후퇴하고 중부전선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상주 화령장 전투는 6·25전쟁 발발 후 한 달도 채 안 된 7월 17일부터 3일 동안의 전투였다. 당시 전투상황은 적 15사단이 상주방면에 투입돼 문경 일대에서 아군의 6사단 퇴로를 차단하고 대구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국군은 적 2개 사단의 집중 공격으로 중부전선이 위기에 봉착하면서 제17연대가 상주로 이동 중이었다. 1차는 상곡리 전투의 대승이었다. 7월 17일과 18일 이틀간 아군 1대대와 북한국 48연대의 싸움이었다. 화령장지역 동네 노인의 신고로 북한군 15사단 48연대의 이동 첩보를 입수, 1대대장 이관소 소령이 매복해 기습전을 펼쳤다. 상곡리 지역에 진지를 구축한 후 일대 도로 및 하천에서 휴식 중인 적군 48연대를 기습공격, 적군 250명을 사살하고 포로 30명을 잡았다. 2차는 동관리 대첩이다. 7월 18일 17연대장은 적의 후속부대가 내려올 것으로 판단했다. 7월 21일 새벽, 적군 45연대를 기습 공격해 섬멸했다. 적 사살 356명, 생포 26명을 비롯해 다수의 전투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린 덕분에 6·25 발발 후 두 번째로 연대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기도 했다. 화령장 전투 대승의 원동력은 1대대가 상주에서 적군의 전령 2명을 생포한 것이었다. 3일간의 화령장 전투에서 적군 606명 사살, 포로 56명, 박격포 36문, 대전차포 9문, 기관총 53점, 소총 1천386점 등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30명으로 극히 미미했다. 당시 17연대에 파견됐던 미 고문관은 “30년간 군대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통쾌한 전투는 처음 보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안동 내성천 전투 북한군은 남침 한 달여 만인 1950년 7월 29일 8사단을 앞세우고 남쪽으로 철수 중이던 국군 8사단을 추격해 수도사단 18연대가 주둔하고 있던 예천으로 밀고 내려왔다. 북한군 12사단도 영주를 거쳐 8사단과 합동으로 국군의 방어선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풍기~영주~예천~안동으로 이어지는 이 전투는 '안동 전투', '내성천 전투'로 불린다. 낙동강 상류를 지나 의성을 거쳐 대구의 배후 도시인 영천을 공략, 남침을 완성하려 했던 북한군 12사단과 8사단을 맞아 국군 8사단과 수도사단 1연대가 안동의 북쪽 천등산과 서쪽 풍산 등지에서 4일 동안 치열한 공방을 벌인 전투였다. 영주와 안동의 임계선에서 지연작전을 펴던 국군 8사단은 안동 북방 옹천에 지휘소를 두고 21연대를 동북방의 349고지에, 16연대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남방 능선에, 10연대는 내성천 좌측 482고지에 각각 포진, 적 2개 사단의 안동 진출을 저지했다. 7월 31일 오후 늦게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8군 사령부는 "낙동강 교두보의 전선 정비를 위해 8월 1일 새벽 5시까지 수도사단과 8사단을 안동에서 철수시키라"는 후퇴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군 8사단은 내성천 일대에서 안동을 사수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펴고 있었으나 엄청난 적의 화력에 견디다 못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8월 1일 새벽녘에야 대대 단위까지 작전명이 전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심지어 모든 병력이 철수하기도 전에 '안동교 폭파'가 단행되면서 엄청난 장병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6연대의 경우 낙동강 이남의 철수지역까지 도달한 병력이 260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안동지역 진출이 지연됨에 따라 동해안 전선의 766부대를 안동지역으로 급파했으나 국군의 완강한 저지로 낙동강 방어선 구축의 결정적 단초를 만들어 주었다. ◆군위 조림산·화산 전투 군위 조림산(638m)과 화산(828m) 전투도 칠곡 다부동 전투에 못지 않은 격전이었다. 조림산은 군위군 산성·의흥·고로면 경계에 있고, 화산(828m)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 경계에서 조림산과 마주하고 있다. 전투의 주무대는 조림산과 마주한 화산 일대로, 국군 제6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퇴각한 북한군 일부와 낙동강을 따라 군위 우보에서 영천 신령 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8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맞섰다. 이 무렵 대구에 있던 임시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영천을 사수하는 신령전투를 비롯해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를 사수하기 위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6일까지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주력 전차를 집중 투입하다시피 했고, 아군은 3.5인치 로켓포와 대전차 특공대를 운용해 전차 파괴에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군위경찰서 산성지서에서 순경으로 근무한 안규찬(86·군위 의흥면 수서2리)씨는 "경산 자인으로 피란가기 전 육군 제6사단 19연대 주력부대는 화수초등학교에 주둔해 있었는데, 내가 연대 수색대원들을 북한군이 주둔해 있던 곳까지 안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군 제8사단이 국군 제6사단에 패하고 난 뒤 군위지역 주민들과 함께 경산 자인에 피란갔다 돌아오니 신녕 갑령재 아래 화수에는 부서진 북한군 전차 7대와 북한군 및 국군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고 목격담을 전했다. 1951년 2월 1·4 후퇴 때 일등병으로 국군 제2사단 17연대 수색대에 배속돼 군위 고로면 학암리 전투에 참가한 김상옥(82·군위 의흥면 읍내2리)씨는 "낙동강 방어선의 한 축인 군위 화산∼영천 신녕지구의 조림산 전투와 화산 전투는 국군도 많이 전사했지만, 북한군의 주력 전차를 적잖게 파괴해 전과를 올린 전투"라고 회고했다. 상주·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군위·이희대기자 hdlee@msnet.co.kr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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