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대중화 서낙자로 이두 집성 문장가로 역사 저술로 한국사 중심 우뚝 | ||||||||||||||||
신라 불교 대중화에 앞섰던 원효와 그의 아들인 학자 설총, 고려의 고승인 일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등은 시대를 넘어 종교와 학문을 빛낸 경북의 인물이다. 또 이육사·조지훈·오일도·권정생은 근현대 한국 문학을 이끌었고, 김주영·이문열은 지금도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도와 경산·안동·청송·영양·군위 등 각 시군은 이들 한국을 대표하는 경북의 역사문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매일신문은 경북의 역사문화인물의 삶과 행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인물조명 사업과 함께 인물 테마기행 방안을 살펴본다.<편집자> ◆삼성현(三聖賢:원효·설총·일연)의 고장, 경산 신라시대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고승 원효,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 설총, 고려시대 고승 일연 등 3성인이 태어난 곳이 바로 경산이다. 이를 근거로 경산을 '삼성현의 고장'이라 부른다. 학자들은 경산(慶山)이 예로부터 '경사가 산만큼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경산은 1959년 9월 11일 발생한 제14호 태풍 '사라호' 때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산 사람들은 이처럼 경산이 자연으로부터 큰 화를 입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그 이름과 경산이 배출해 낸 많은 성현들의 음덕 때문이라고 자평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위만조선의 우거왕 때 한강 이남에 위치하던 진국이 중국 한나라에 국서를 보내는 등 통교를 했다. 기원 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과 함께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고 압록강 중류지역에 고구려가 있던 시기, 이미 한반도 중남부에는 삼한이 78개 소국을 두고 있었다. 경산은 당시 변한과 진한의 중심부에 속했던 압독소국으로 남쪽으로 이서고국, 동북쪽으로 골벌소국, 서북방향으로 탁순소국을 경계로 했다. 이후 기원 전 57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사로소국이 신라로 국호를 바꾸고 인접한 소국들을 흡수하면서 이른바 삼국시대 개막과 함께 압독소국은 신라에 병합됐다. 선덕여왕 11년 압독국이 신라의 한 주로 격하되면서 김유신 장군이 압량 군주로 부임, 경산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루는 전초기지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호국불교의 성지인 삼산오악(三山五岳) 중 경산의 팔공산이 포함되면서 경산은 신라 삼국통일의 정신적 성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특히 김유신 장군이 군주로 부임하고 현존하는 세 곳의 화랑연무장과 이들 훈련장에서 양성된 병사들이 백제·고구려와의 격전에 나섰던 점 등으로 볼 때 경산이 삼국통일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경산은 외형적으로 호국불교의 한 도량으로 크고 작은 문화유적과 민속문화를 남겼고, 정신적으로는 압독국 압량인들이 신라에 항거하면서도 신라 삼국통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애환을 바탕으로 신라 경덕왕 9년(750년)에는 지금의 경산 하양 자인을 중심으로 한 3개 군현이 각각 독립자치 체제를 유지했으며, 고려 말엽에는 3개 군현이 향교와 서원을 건립, 유림들을 배출하면서 효자 열부 열녀가 나왔다. 조선 중기 불교탄압 때는 경산의 불교 전체가 수난기를 맞았으며 이 과정에서 경산이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고장, 불지의 고장, 학문의 고장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화쟁국사(和諍國師) 원효(元曉) 원효(617~686)는 신라 10성(聖)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을 위해 노력했다. 저서로는 '금강삼매경논소'(金剛三昧經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이 있다. 경산박물관장을 지낸 민속학예사 김종국(62) 박사는 "원효는 경산시 유곡동(당시 압량군) 현성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조선말 '홍유후실기목록(경주지 편)'에 따르면 원효는 '생어유곡장어유천'(生於油谷長於柳川)이라 해 유곡동에서 태어나 여천동(유곡동 바로 옆)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원효는 그의 생가를 고친 '초개사'(初開寺)를 통해 대승불교의 문을 열었다. 이 절은 후일 '신림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887년 편찬된 '영남읍지'에는 신림사가 신라문무왕 원년에 원효가 창건하고 5층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곳의 5층탑은 현재 경산박물관에 옮겨져 보관 중이다. 원효가 평소 자주 찾았던 곳은 중악산(현재의 팔공산)의 한 석굴로 주변 22㎞ 반경의 10여 개 석굴을 찾아 다니며 수도정진했다는 기록이 있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薛) 씨. 신라 11관등인 설담날(薛談捺)의 아들로 15세에 출가해 31세에 황룡사에서 승려가 돼 수도정진했다. 661년 의상과 함께 나선 당나라 구법의 길 도중 당항성의 한 토굴에서 해골 속의 물을 마신 뒤 큰 깨달음을 갖고 귀환해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하면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다. 하루는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니) 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배회하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 아유다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게 됐다. 이로부터 스스로 파계로 단정,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고 나무를 깎아 만든 바가지를 만들어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대승불교 전파)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서기 686년 69세로 경주의 혈사(穴寺)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2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불교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대저술가이며, 신라 10성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현존하는 저술은 20부 22권으로 특히 '대승기신론'은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했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이나 용수 등과 같은 고승들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다. 학승으로 높이 평가될 뿐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 당시의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한 그의 사상은 오늘날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고 불린다. 이는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 무애사상(無碍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설총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기 직전인 태종 무열왕 때 경산 초개사에서 원효의 아들로 태어나 문무왕·효소왕을 거쳐 성덕왕 때까지 아버지의 고향 경산과 어머니의 고향 경주를 왕래하며 활동한 유학자다. 자란 곳은 경주 교동의 요석궁(遙昔宮) 자리다. 이곳은 아버지인 원효가 파계한 집이기도 하다. 자가 총지(聰智)였던 설총은 7세 때 한학에 통달, 중국어까지 해독하고 경서를 외워 버리는 등으로 총명성이 뛰어났다. 국학(國學)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 발전에 공헌했으며, 이두(吏讀)를 정리하고 집대성했다. 그의 성인기 때 집은 아버지 원효가 입적한 혈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호는 빙월당(氷月堂)으로 강수·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문장으로, 또 신라 10현(賢) 중 한 사람이다. 벼슬은 한림을 지냈으며,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았다. 삼국시대부터 수용해온 중국의 경학(經學) 가운데서도 훈고학을 익히고 당나라시대에 와서 하나로 통일된 유학의 경전을 연구, 우리말로 해석하고 한문경전에 훈고학적인 주석을 달았던 학자이다. 설총의 '석독구결'(釋讀口訣)은 경전의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는 방법을 표기한 것으로, 향찰과 이두 등 모든 표기법에 응용돼 우리말 표기법의 원천이 됐다. 또 신문왕에게 충고했다고 전해지는 국내 가장 오래된 가전(假傳)인 '삼국사기'의 '화왕계'(花王戒)는 신문왕으로 하여금 후대왕의 계(戒)로 삼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서기 1022년 고려 현종 13년에 홍유후로 추봉돼 동방18현 중 한 사람으로 문묘와 경주의 서악서원, 경산시 도동재에서 배향되고 있다. 한국 유학의 종주로 추앙되고 있는 것. 후손들은 남산면 하대리 현재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조성지 동쪽 길목 '도동재'(道東齋)에서 설총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3월 제를 올리고 있다.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일연(1206~1289)은 성은 김, 호는 목암(睦菴)·무극(無極)이다. 고종 때 대선사에 이르고, 충렬왕 때 국존이 됐다. 저서로 '삼국유사', '어록', '계승잡저' 등이 있다. 서기 1206년(고려 희종2년), 지금의 경산시, 당시 장산군(章山郡), 현재의 남천면 산전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회연(晦然) 또는 일연, 아명은 견명(見明). 1, 2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가 마을 암자에 데려갔는데 너무나 총명한 나머지 9세(1214년 고종1년)에 어머니와 함께 해양(현재 광주시) 무량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5년 뒤 설악산 진전사에서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됐다. 22세에 승과에 장원급제해 달성 현풍 비슬산의 보당암 주지로 수행 중 '생계는 줄지 않고 불계는 늘지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라는 화두로 득도한다. 32세에 삼중대사가 되고 14세에 선사, 44세(1250년)에 당대 최우의 사람으로 실력자였던 정안(鄭晏)의 부름을 받아 남해 정림사에 머물면서 남해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증의로, 팔만대장경 조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그후 54세에 대선사에 오른 뒤 원종 2년 강화도 선원사 주지가 돼 보조국사 지눌의 법을 계승하고 포항 운제산 오어사, 달성 인흥사 등에서 강론하고 충렬왕 3년에 왕명으로 청도 운문사 주지에 올라 와왕에게 불경을 강론하는 등으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켜 83세 되던 해(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돼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효자였던 일연은 그 이듬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귀향, 조정으로부터 받은 토지 100경으로 군위 인각사를 중건하고 이때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삼국유사를 통해 단군신화를 비롯한 민간설화를 수집, 정리하고 향가는 물론이고 불교관련 글을 집대성했다. 이 밖에도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게승잡저(偈乘雜著),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경산·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 2010년 09월 25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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