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성당과 이인성 나무 38세로 요절한 천재화가, 성당 앞뜰 감나무도 빈 가지 울려 애도 | ||||||||||
1926년 어느 가을날, 계산성당의 성모상이 따사로운 햇살을 쬐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천고마비의 계절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림 그리기 좋은 날씨였다. 이인성은 집을 나와 병원에서 스케치북을 찾아 인근 계산성당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동네 조그마한 식당에서 밥과 대포를 팔며 어렵게 살아가는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아들을 보면 몽둥이를 들고 따라와 혼을 내기 때문에 인성은 부모 눈을 피해 남성로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계산성당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안 그래도 어려운 형편에 그림을 그리면 굶어죽는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림을 그리면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그림 그리는 어린 인성에게 아버지는 버릇처럼 말하며 인성의 엉덩이를 때리곤 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서동진(徐東振) 선생이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미술을 이해하는 남산병원 원장 김재명을 인성에게 소개해주었다. 명문 교남학교(대륜학교 전신)의 미술교사였던 서동진 선생은 대구 화단을 이끌고 있던 서양화의 선구자였고 병원을 하는 김재명은 대구의 대표적인 인텔리로 기꺼이 인성의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성당 앞 감나무에 주홍색 감이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감꽃이 한창이던 때, 김옥순은 그녀 부모를 졸라 인성에게 이젤을 사주었다. 옥순은 김재명 원장의 딸이었다. 인성은 감꽃을 따 실에 꿰어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옥순이에게 걸어주었다. 옥순이는 너무 예쁘다며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그때 옥순이가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했다. “인성아, 이담에 꽃 가락지도 만들어 줘야돼!” 인성은 그 귀여운 모습과 그 사랑스런 목소리를 하얀 도화지에 담고 싶었다. 성당을 배경으로 한 감나무를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감꽃 목걸이를 걸고 좋아하는 옥순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인성은 아버지인가 여겨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이쾌대였다. 이쾌대(李快大·1913~1965)는 인성이 다니는 수창학교 학생으로 나이는 인성보다 한 살 어렸지만 학년은 인성보다 두 학년이나 높아서 피장파장으로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인성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열한 살에 입학한 까닭이었다. 이쾌대는 군수까지 지낸 칠곡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인성이 그림을 잘 그려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전에서 특선을 한 이후 유명세를 타자 인성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인성도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림에 재능이 많은 친구였다. 쾌대는 체구가 크고 건강하여 운동에 재능을 보여 야구를 하려했으나 집안에서 극구 반대하여 그림에 취미를 붙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의 맏형 이여성(李如星)의 영향 때문인지 쾌대도 일찍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 솜씨도 남달랐다. 인성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는 사이 인성의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옥순이와 서동진(徐東振) 선생도 어느 틈에 왔는지 구경꾼 사이에 끼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인성아, 날 그린 거 맞지?” 인물의 특징이 드러나자 옥순이가 좋아서 만세를 불렀다.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쾌대의 미간이 실룩거렸다. “야, 그게 감나무 그림이지 옥순이 그림이냐? 내가 제대로 한 번 그려보지.” 쾌대가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섰다. 쾌대는 인성의 연필을 빼앗아 들고 인성이 그렸던 그림을 다른 도화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서동진 선생도 흥미로운 듯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의 그림 경연을 지켜보았다. 같은 구도의 그림이었지만 두 그림이 주는 느낌은 완전히 판이했다. 쾌대의 스케치가 완성되자 두 사람의 그림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서동진 선생에게 쏠렸다. 서동진 선생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때 같이 옆에서 지켜보던 옥순이가 소리쳤다. “난 이게 더 좋아!” 하고는 인성의 그림을 가지고 달아났다. 쾌대의 얼굴에 먹구름이 지나갔다. 쾌대는 옥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인 채 인교동 쪽으로 사라졌다. 인성도 그림 도구를 챙겨 옥순이네 병원에 맡기고 감나무 아래로 돌아왔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철부지 옥순이의 칭찬이 전문가인 서동진 선생의 칭찬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인성은 감나무에 기대어 옥순이와 결혼하여 같이 사는 자신을 상상해보며 얼굴을 붉혔다. 감나무가 사랑스러웠다. 잘 익은 감들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그 날 이후로 인성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감나무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고 열에 아홉 정도는 거기에서 옥순이를 만날 수 있었다. 들국화로 만든 꽃반지도 옥순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옥순이는 인성이 주었던 감꽃 목걸이와 꽃반지를 표구까지 해서 책상 위에 걸어두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나무 아래에서 옥순이네 병원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등을 탁 쳤다. 이쾌대였다. “야, 인성아! 너, 옥순이 좋아하지? 내가 옥순이랑 사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우리 한판 붙을까? 내가 너한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거다. 지는 쪽이 깨끗이 양보하기로 하고 사나이답게 한판 붙자.” 인성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 동안 멍하니 쾌대를 바라보았다. 쾌대는 평소와 달리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고 꽤 흥분한 상태로 보였다. 인성은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었고 섣불리 옥순이를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쾌대야, 그건 옥순이 마음이지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가 옥순이와 사귀어도 괜찮다는 말이지? 확실히 말해라!” “…그러니까 내 말은 옥순이 뜻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지….” “알았다. 옥순이한테 그렇게 말할게.” 쾌대가 남산병원 쪽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인성은 자기와 쾌대를 비교해 보았다. 쾌대는 만석꾼 대지주 아들에 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 하는 데다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며 인물도 좋았다. 인성이 더 나은 것이라곤 그림 실력밖에 없었다. 그림 그려서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라는 아버지의 나무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대포 한 잔에 김치 한 점 씹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버지 모습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병원의 의젓한 의사 선생님인 옥순이 아버지와 대비가 되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옥순이가 상기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 “인성아, 너 진짜 쾌대한테 그렇게 말했나? 진짜가? 내가 쾌대랑 사귀어도 괜찮다고 했나?” “…그냥 네 마음에 달렸다고 했다.” 인성이 겁먹은 눈빛으로 옥순의 눈을 피하며 몸을 뒤로 빼자 옥순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몸을 휙 돌려 집으로 달려가 버렸다. 인성은 비겁한 자신이 너무 미워 감나무에 머리를 찧었다. 그날 이후로 옥순은 인성을 의식적으로 피했고 더 이상 감나무 아래로 오지도 않았다. 인성은 서동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쾌대보다 더 잘하고 또 앞으로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그림밖에 없다는 것을 인성은 명백히 알았다. 그림에서 최고가 되는 길만이 옥순이를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이인성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래 제10회부터 내리 6번을 특선하는 유례 없는 쾌거를 달성하였고 일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김옥순과 재회하여 결혼까지 하고 남산병원 3층에 꿈에 그리던 개인 화실도 내었다. 그러나 결혼 4년 만에 김옥순과 사별한 이인성은 실의에 빠져 우울증과 고독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절 그린 그림 중에 계산성당과 감나무를 그린 것이 몇 점 남아 있어 그의 울적함과 상실감을 엿볼 수 있다. 1947년 그의 나이 35세 때, 이인성은 김창경과 재혼하고 장남을 낳은 후 전시회를 여는 등 야심찬 재기를 노렸으나, 1950년 전쟁 중에 치안대원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나 말이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아?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대원은 분기탱천하여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몸도 채 가누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작가 최인호가 오래 전에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이쾌대도 이인성에 못지않은 천재성을 보여주었으나 이인성에 가려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맏형인 이여성의 영향 때문인지 6·25전쟁 후 자진 월북하였고 그 후 맏형 이여성이 숙청됨에 따라 이쾌대도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미처 발휘하지 못한 채 1965년 북한에서 그 한 많은 생을 쓸쓸히 마감했다고 한다. 대구 수창학교가 낳은 두 천재, 이인성과 이쾌대는 1946년 독립미술가협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으나 서로가 서로에 대한 애정을 다 보여주지도 못하고 재능도 제대로 발휘해 보지 못한 채,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허덕이다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오늘도 계산성당 내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다. 사람들은 이 감나무를 '이인성 나무' 라 불렀다. 감나무는 이쾌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철환(소설가·대구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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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1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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