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비내리는 고모령의 무대를 찾아서

이정웅 2011. 9. 10. 07:54

 

비내리는 고모령의 무대를 찾아서

 

 

노래 '비내리는 고모령,의 탄생배경

1946년 어느 날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유호, 가수 현인이 함께 밤을 새우며 레코드 취입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한 곡이 모자랐다고 했다. 다급한 유씨가 방에 있던 지도책을 꺼내 살펴보다가 고모(顧母)라는 지명을 발견하고 어머니와 이별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라 쓴 가사에 곡을 붙여 탄생했다고 한다. (조선일보1990,7, 22)

이후 발발한 한국동란으로 3.8선을 가운데 두고 남북의 왕래가 끊어지면서, 숱한 사람들이 부모가 있는 고향을 등지게 되고, 현인 특유의 구수한 저음이 실향민들의 가슴을 저미게 하면서 대 히트를 치게 되어 조용하던 마을 고모가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다 되었다.

 

고모역

 

경부선 동대구역에서 부산 방향으로 약 5.1km 떨어진 고모역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간이역으로 출발 1931년부터 영업을 해 오다가 1949년 한 때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역 주변 마을의 농민들이 주로 애용하던 곳이었으나 한국철도공사는 2004년 7월 여객 업무를 중단했다.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역은 대구의 칠성시장이나 번개시장으로 가는 주민들이 많이 이용했지만 차츰 승객이 뜸해지면서 화물차만 머무는 간이역으로 바뀐 뒤 이제는 화물업무마저 인근 경산역에 내주고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철도공사 대구지사 관계자는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역들이지만 이용객이 거의 없어 역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며 "그러나 건물은 그대로 두되 카페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용객들로 붐비던 역사는 잡초만 우거져 있고 역무원이 승객들의 차표를 검색하던 곳은 거미줄이 처져있으나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지역의 원로 시인인 박해수님의 시비(글씨 류영희) '고모역'이 설치되어 있어서다.

 

박해수의 시 '고모역'

 

고모역에 가면 /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 뒤 돌아보면 옛 역은 스러지고 / 시레기 줄에 얽혀 살던 / 허기진 시절의 허기진 가족들 / 아 바스라지고 부서진 옛 기억들 / 부엉새 소리만 녹슨다 / 논두렁 사라진 / 달빛 화물열차는 몸 무거워 / 달빛까지 함께 싣고 / 쉬어가던 역이다 // 고모역에 가면 / 어머니의 손재봉틀처럼 / 덜커덩 덜커덩거리는 화물열차만 / 꽁지 빠진 새처럼 / 검은 물새떼처럼 / 허기지게 날아가는 / 그 옛날 고모역 선로 위에서 / 아 이즈러진 저 달이 / 아 이즈러진 저 달이 / 어머니의 눈물처럼 그렁그렁 /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구나 /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는 / 슬픔처럼 비껴 서 있는 / 그 옛날 고모역에서.

 

숱한 이야기를 실어나르던 고모역

 박해수 시인의 시비

 

 

고모동의 유래

 

지금까지 알려진 고모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동생과 형이 싸우는 것을 보고 실망한 어머니가 집을 떠나면서 고갯마루에서 뒤 돌아보아 돌아 볼 고(顧), 어미 모(母)자의 고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주민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고모마을

 

“옛날 이 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지만 금실(琴瑟)이 좋은 부부가 예쁜 사내 아이 하나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자 효심이 지극한 부부는 정성을 다해 간병했으나 좀처럼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때 마침 탁발을 하러 온 스님이 아이를 삶아 어머니께 드리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고민에 빠진 부부는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으되 어머니는 한 번 돌아가시면 평생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마침내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하고 큰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기다렸다가 밖에서 놀다 오는 아이를 안고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으려는 찰나 아이가 힐끗 어미를 돌아보았으나 솥뚜껑을 닫고 한동안 멍한 마음으로 계속 불을 지피고 있는데 조금 전 가마솥에 넣었던 아이가 ‘엄마’ 하면서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자 깜짝 놀란 어미가 아이를 부등켜 안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더니 한결 같이 조금 전 솥에 넣은 아이는 부부의 지극한 효심에 탄복한 하늘이 보낸 산삼이 천년을 묵어 아이로 환생한 동삼(童參)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돌아볼 고(顧)어미 모(母)는 동삼이 가마솥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를 돌아본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엉뚱한 발상으로 지어진 가사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고유한 전설마저 잊어지거나 와전되어 안타깝다.

시대상황을 반영한 유행가사로 지역이 널리 알려지는 것도 좋지만 지극한 효성의 부부이야기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팝나무 노거수

 

5월 초순 눈송이처럼 흰 꽃이 피는 이팝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1,000여 종의 나무 중에서 대구가 자생지라는 나무다.

물푸레나무과의 낙엽 활엽수로 큰키나무다.

꽃이 쌀밥의 옛말 ‘이밥’같이 생겨서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과 24절기의 하나인 '입하(立夏)’가 변해서 이팝나무로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들고 꽃이 적게 피면 흉년이 들어 풍흉(豊凶)을 점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다.

즉 이 나무는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는 해는 꽃을 많이 피우는데 논농사 위주이고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옛 날 충분한 비는 못자리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뭄이 들면 못자리를 할 수 없어 그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흉년이 된다.

고모동에는 4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어 꽃이 필 때 장관이다.

 

 

수령 300여 년의 이팝나무

이팝나무보소수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