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5년(숙종 31) 임란공신 아헌 송원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매양서원 그 후 매헌 송명기와 남촌 송이석이 종향되었다.
매양서원 강당
매양서원 현판
상현사
상현사 현판
서원 앞에 서 있는 매헌 송원기의 기적비
매남마을 전경
임란공신 송원기와
매헌과 남촌을 기리는 매양서원
칠곡이 대구의 주거지역으로 급격히 발전하면서 아름답던 전원이 거대한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그러나 이런 개발 중에도 소외된 곳이 있으니 북구 태전동 태복산 남쪽에 위치한 매남마을이다.
달성 배씨와 야성 송씨의 집성촌이기도 하지만 임란공신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 1548~1615)를 주향하고, 매헌 송명기(송명기,1680~1755)와 남촌 송이석(1698~1782)을 종향하는 매양서원이 있는 곳이다.
본관지가 합천군 야로인 야성 송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689년(숙종 15)이라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320여 년 전이다.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아헌의 8대조 송구(宋構, ?~?)가 성주에 자리 잡아 오래 세거(世居)해왔는데 아헌 대에 칠곡 고평(지금의 북구 관음동)에 옮겨 살다가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 1680~1755)가 아버지 송희(宋熙)를 따라 입향함으로 매남 송씨의 1세대가 되었다.
주향자 아헌은 아버지 송사호(宋師顥)와 어머니 팔거도씨 사이에서 1548년(명종 3) 성주 유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숙부 신연공으로부터 커서는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이른 바 성주 양 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생원, 진사 양 시험에 합격하고 , 1610년(광해군 2) 63세 때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김천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임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지원군이 팔거(오늘날의 북구 읍내동 일대)에 주둔했다.
조선을 돕기 위해 먼 길을 온 군사들이었지만 군량미가 부족하여 곤경에 처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는 없었던 아헌은 앞장서서 쌀 700석의 모아 그들을 지원했다.
또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든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군무십책(軍務十策)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때 중국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파견군의 경리 양호(楊鎬)와의 사소한 마찰로 조선이 일본과 힘을 합쳐 장차 명을 침공할 것이라고 있지도 않을 사실을 황제에게 허위보고하여 조선과 명나라 간에 금이 간 일이 있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항복을 진주사로, 이정구(李廷龜)를 부사로 하여 그렇지 않다는 내용의 변무서(卞誣書)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이 때 재야의 많은 선비들도 지어 올렸지만 오직 공의 변무서만 채택되어 공의 명성이 중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공은 군주가 지내야할 덕목 여섯 가지를 강조하는 육강소(六綱疏)와 정구(1543~1620)를 모함한 빅이립의 죄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여헌 장현광, 낙재 서사원과 교유하다가 1615년(광해군 7) 68세로 돌아가셨다.
정구가 '어려서부터 장년과 노년이 되도록 세 번이나 살기 좋은 이웃이 되었고 아울러 친지로 인정함을 후하게 받아서 은혜롭게 나를 좋아함이 이미 깊었고 종유(從遊)가 가장 오래되어서 학문 연마에 서로를 도왔으며 걱정과 즐거움은 반드시 함께하면서 오직 영세토록 기대했는데 오늘이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하고 슬퍼했다.
선무원종공신으로 서훈되고 동계 정온(鄭蘊,1569~1641)의 계청에 의하여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에 증직되었다.
1705년(숙종 31) 사림의 발의로 그를 기리는 매양서원(梅養書院)이 세워졌다.
종향자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 1680~1755)와 남촌(南村) 송이석(宋履錫, 1698~1782)는 아버지와 아들로 모두 아헌의 후손이다.
5세손인 매헌은 1727년(영조 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당대 고명한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성리(性理)의 이론을 추구하는데 몰두했다.
서헌 이세형과 '인심도심' '사단칠론'을 토론하고 연구하였으며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저술하였다. 높은 학문과 고매한 인격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6세손인 남촌은 아버지 매헌보다 앞선 1721(경종 1)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 역시 아버지를 닮아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김천 수도산 초입에 있던 무흘정사의 장서각에 머물면서 그 곳에 있는 정구가 모아둔 책을 읽으면서 내용 중 본받을 만한 좋은 말을 뽑아 <무흘서각초록> 2권을 편찬했으며 <퇴서졀요>, <심경>, <퇴도언행록> 등 고전을 수사(手寫)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을 기리는 매양서원은 최근 말끔히 복원되었다. 국난극복에 앞장서고 조선 후기 칠곡지역의 문풍 진작(振作)에 크게 기여한 분들을 기리는 곳인데도 한적한 것은 여느 서원과 마찬가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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