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선암서원

이정웅 2012. 2. 2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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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모신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7)에 매전면 동산동 운수정에 두분의 위패를 모시고 향현사라 하다가, 선조 10년(1577)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 하였다. 숙종 2년(1676)에 다시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고종 15년(1878)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득월정·행랑채가 ㄷ자 형을 이루고 그 뒤쪽으로는 선암서당이 있다. 선암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그 양쪽으로는 방을 들였다.

대문채의 남쪽칸으로는 송은·우당·소요당·제우당 등 14의사의 문집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이 건물(建物)은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선생을 모신 곳으로 초창(初創)은 조선(朝鮮) 원년(元年)(1568) 매전면(梅田面) 동산동(東山洞) 운수정(雲樹亭)의 향현사(鄕賢祠)이었다. 그후 선조 10년(1577) 군수(郡守) 황응규(黃應奎)가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仙巖書院)으로 개칭(改稱)하였다. 숙종(肅宗) 2년(1676)에는 구눗 서문중(徐文重)이 중창하였으나 지금의 건물들은 고종(高宗) 15년(1878) 소요당(逍遙堂) 선생의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다.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안채, 득월정(得月亭), 행랑채가 ㄷ자 평면(平面)을 이루고 그 뒤편으로 남향(南向)한 선암서당(仙巖書堂)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2칸으로 가운데 3칸을 대청마루를 깔고, 양쪽으로는 방을 들였는데 위패(位牌)는 모셔지지 않았다. 대문채의 남측(南側)칸으로는 송은(松隱), 우당(憂堂), 소요당(逍遙堂), 제우당(悌友堂) 등 14의사(十四義士)의 문집(文集) 목판(木版)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