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한개마을을 빛낸 응와 이원조 대감

이정웅 2012. 7. 28. 12:03

 

 

한개 마을 빛낸 응와 이원조 대감

 

 

경상북도 성주 대산리 속칭 ‘한개(大浦)마을’은 성산 이씨가 세거하는 반촌(班村)이다. 이 마을에 국불천위(國不遷位) 종가인 세칭 ‘대감댁’이 있다.

대감댁은 안동 하회마을에 서애 류성룡 종가를 그렇게 부를 정도로 듣기 어려운 ‘관(官) 택호’다. 이는 이 마을에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선생이 고종 때 공조판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솟을 대문 위로 ‘정헌공응와이판서구택(定憲公凝窩李判書舊宅)’이란 현판이 당당하게 걸려 있다. 응와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소년등과(少年登科)다. 예전에는 소년등과를 경계했다.

빠른 출세로 인해 학문과 수양이 올바르게 되지 못함을 염려한 때문이다. 이 때 가학(家學)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가르침이 미담으로 전해진다.

응와는 양자를 갔다. 생가의 부친인 함청헌(涵淸軒) 이형진(李亨鎭, 生員)은 “너는 큰 재간도 없는 터에 너무 빨리 단번에 급제하였다.

만약 크게 경계하고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면 원대한(遠大)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양가(養家)의 부친은 더욱 절실한 교훈을 내렸다.

“나는 한평생 허명(虛名) 때문에 그르쳤다. 너 역시 내 뒤를 따라 너무 빨리 급제하였으니 벼슬에 나갈 생각은 애초부터 가지지 말아라.

 

 

오직 문을 닫고서 글을 읽어서 실학(實學)에 종사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라 했다. 양가 부친인 농서(農棲) 이규진(李奎鎭)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다.

농서는 자호(自號)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관인(官人)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일생을 무실(務實)과 검약(儉約)으로 일관했다. 응와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급제 뒤 10년간 학문에 전념했다.

그에게 학문은 어떤 것이었나? 필자는 우선 그의 호에 주목했다. 얼마간은 생소한 ‘호우(毫宇)’라는 호도 썼다. 호우는 ‘조금씩 쌓아서 큰 것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

그 뒤에는 ‘응와(凝窩)’라 했는데, 이 역시 ‘뒤늦게 세상에서 물러나 수양하면서 거두어들여 응정(凝定)하는 공부에 뜻을 둔다.’는 의미다. 모두가 이론이나 관념적인 것이 아닌 참된 수양과 실천에 두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응와의 연보를 보면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자면음(自勉吟)’을 지었는데, 여기서 그는 “내가 일찍이 과거공부에 힘써 문예에 대한 재주가 조금 있었는데 이만하면 한 시대에 떨치기가 충분하다고 여겨 방자하게 공명을 스스로 기약하여 학문이 좋은 줄 알지 못하다가, 지금에서야 생각을 고치게 되니 크게 술에 취했다가 정신이 든 것 같았다.”라고 고백했다.

이 글을 쓴 뒤 응와는 곧바로 안동 예안을 들어가 도산서원을 배알하고 다시 여강서원에 갔다 돌아온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을, 그리고 여강서원은 퇴계와 학봉, 서애를 모신 안동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후일 응와가 대산 이상정의 수제자인 입재 정종로의 문하에 들어가 퇴계학의 도학 적전을 이은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여강서원(廬江書院, 후일에 虎溪書院으로 개칭)은 대산 이상정을 추향(追享)하는 문제로 소위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것이 생겨 오랫동안 영남 선비사회를 내홍에 싸이게 한 서원이었다.

이 여행은 퇴계학파의 선학에 대한 관심과 그 계승에 대한 다짐의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응와 종택은 사랑 별채와 북비고택, 안채, 그리고 부속 건물들이 정채(精彩) 있게 보존되어 있다. 이 집에 들어설 때마다 영남 반가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가슴 벅찼다.

더욱이 이 집 주인인 이수학(李洙鶴, 1938년생) 씨는 (사)박약회 수석부회장으로 오랫동안 만났던 분이어서 여느 종가와도 다른 느낌이 있었다.

 

 

필자는 종손 이수학 씨로부터 종가의 고민은 물론 전통문화가 점차 무너져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서도 흉금을 트고 해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상당부분은 혼자 듣기 아까운 내용들이었다. 대감댁은 막 외식을 마치고 손주들의 재롱 속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예전 대감댁에는 대감이 탔을 가마와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문 앞에는 최고급 국산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종손의 차였다. ‘좋은 차가 대감댁 앞에 있으니 보기에도 좋습니다.’라고 인사하자, 종손은, “이게 서양 당나귀 아닌가?”하고 농으로 받아주셨다. 필자는 판서댁에 ‘판사’가 다시 났다고 생각했다.

차종손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를 지낸 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대감이 탔을 가마나 말과, 판사를 지낸 차종손의 고급 승용차를 대비해본 것이다.

 

 

종손은 성균관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뒤 대구로 내려왔다. 40년 바쁜 객지 생활 중에도 유림 실천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포항공대 설립자인 김호길 박사와 권오봉 교수와 초창기 박약회 운동을 함께 했으며, 두 분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주요한 결정을 도맡았다. 종손은 박약회의 회 세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종손은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종가를 찾았던 날도 사랑방 경상 위에는 국역 연려실기술이 펼쳐져 있었다.

십 수 년 전에 사두고 다 보지 못한 것을 이제 시간이 좀 나서 읽어보고 있다고 했다. 70을 맞은 종손의 독서열은 가문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 느꼈다. 또 종손은 양자를 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묵묵히 실천했다.

아들 4형제를 낳고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3년 상을 나기 위해 소까지 잡으며 예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자 했으나 그 때문에 오랫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이 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종손은 조부까지 양대(兩代) 봉사를 단행했다.

종가의 이러한 선택은 수다한 오해를 불러왔고 오랜 지기로부터 절교를 통보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길이야말로 종가를 오랫동안 지키게 하는 방법임을 알기에 양보할 수 없었다.

종손이 쓴 책 제목을 보니, ‘공수래(拱手來) 공수거(拱手去)’다. 제목이 재미있어 생각해보니,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보다는 훨씬 철학적이며, 유가적(儒家的)인 시각에서 나온 제목이라 좋았다.

유가의 태도는 예모를 갖추는 것인데, 그 기본이 손을 가지런히 하는 공수다. 내용을 보니 평소 들었던 이야기가 여러 편 들어 있다.

모든 작품이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종가 종손으로서 하기 어려운 자기 고백의 백미는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라는 작품이다.

한개 대감댁은 상주나 안동 양반 사랑방에서는 7대조인 사미당(四美堂, 敏謙, 생원)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5대조 응와 선생의 성취를 두고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표현과 함께 ‘새 양반’이라고 농을 했다. 아는 문벌이 그렇게 높지 않은 가문에서 한 인물이 큰 성취를 통해 가문의 면모를 일신한 경우를 빗댄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춰서 종손은 응와 선생의 성취는 7대조 사미당 선조의 자손들을 위한 정성과 가르침의 결실이며, 아무런 노력도 없이 요행으로 가문의 명예를 높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때 훈도의 상징물이 있었다. 목침(木枕)이다. 나무로 만든 베개를 말하는데, 전통사회에서는 자질들을 꾸지람 할 때 목침 위에 올려 새우고 종아리를 때린다. 이 집에서는 이 물건을 달리 ‘경침(警枕)’이라고 불렀다.

 

응와의 조모인 진주 강씨는 아들인 농서공(奎鎭)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오늘의 경사는 우리 집 경침 덕이다.”라고 했다 한다.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종손은, “외부에서는 우리 사미당 할배께서 자녀들이 학업에 소홀하면, ‘도련님 우리도 양반되어 봅시다.’라며 독려했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양반 사회에서는 그 정도가 비슷한 대상자들과 수작할 때 농으로 상대의 약점을 꺼내 풍자한다. 반가의 위상이 다소간 낮다고 그렇게 농을 했지만, 종손의 12대조가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이며 문과에 급제해 조정에 벼슬한 분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도 양반되어 봅시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구나 종손의 9대조며 응와의 증조부인 돈재(碩文)이 무과에 급제하여 사도세자를 모시던 선전관의 직임에 있었던 분이었다.

영남에서 벼슬로만 보더라도 최고의 양반가라 할 수 있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경우도 서애가 영의정을 낸 이후 8대손에 이르러 정승 한 분, 판서 한 분이 났을 뿐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남 명문가에 행직을 판서를 지낸 분을 조상을 모시고 있지 못하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이곳 성산 이씨들의 성취는 대단한 것으로, ‘새 양반’이라고 꼬집어보고도 싶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종손의 8대조는 호를 돈재로 쓰는데 북비라는 별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6대조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을 때 국왕인 정조는 “너희 집에 지금도 북비(북쪽으로 낸 대문)가 있느냐?”고 하문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정조로서는 선친인 사도세자를 충성스럽게 모셨던 신하의 안부를 물은 것이다.

 

 

부자 상극으로 혼란했던 사직(社稷)을 염려해 사도세자의 영혼이나마 추모하려는 애절한 마음으로 집의 문을 북쪽으로 옮겨 낸 분이 바로 8대조인 돈재공이다.

밤중에 집을 들어서면서 오른편으로 작은 대문 위로 걸려 있는 북비라는 현판은 충의(忠義)의 정신이 아직 이 집에 머물러 있음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보였다. 근자에 소설가 하용준 씨가 대하소설 ‘북비’를 발표했다. 이미 몇 권이 세상에 나왔다. 북비로부터 응와에 이르는 4대는 대하소설 소재로 제격이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소설 북비의 발간은 전통마을로서의 위상에 문학의 고향을 더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소설 북비는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라 한다.

종손은 슬하에 4남을 두었다. 차종손 재근(在根) 씨는 10년간 판사로 봉직한 뒤 변호사로 활동 중이고, 둘째 진근(震根) 씨는 물리학 박사, 셋째 방근(邦根) 씨는 벤처회사 사장, 넷째 우근(宇根) 씨는 의사다. 응와는 증조부인 돈재공(遯齋公, 이석문)의 충의의 정신과 조부인 사미당(四美堂, 이민겸)의 ‘경침(警枕)’의 가르침과 생·양가 부친의 문과 후 10년 독서의 훈계를 몸소 실천해 관직으로는 정2품 판서에 이르렀고 학문으로는 입재 정종로 문하의 저명한 학자로 조카인 한주 이진상에게 영남 주리론의 맥은 이은 이로 알려져 있다. 종택 사랑채로 들어서면서 눈에 띄는 것은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이라는 특색 있는 현판이다. 독서를 통해 자식들을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현판은 응와 선생이 증조부의 가르침을 되새겨 건 것이라 한다. 증조부의 학은(學恩)에 감사함과 아울러 재삼 독서를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사실, ‘독서’라고 하면 응와 선생의 예가 하나의 전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공부를 한다고 할 때 일차적인 목표인 시험에 합격을 하고나면 대개는 손을 떼기 마련이다. 세상 사람들이 고 3때나, 또는 고등고시를 준비할 때와 같이 평생을 공부한다면 후일에 그 성취가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공부가 직업인 대학교수나 교사를 포함해 어렵다는 국가고시를 통과한 이들의 10년, 또는 정년 무렵의 공부 진척 정도를 평가한다면, 공부란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 사회에서의 공부란, 지식위주가 아니라 수양과 전인 교육적 측면이 더욱 강했다. 18살에 문과에 급제한 응와가 벼슬길로 내달리지 않고 10년을 기약해 본연의 학문에 침잠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응와는 부형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입재 정종로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성리학의 본산인 안동을 찾아 호곡 류범휴, 수정재 류정문, 정재 류치명 등 그 지역 일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와 연마에 힘썼다. 응와는 정재에 대해서, ‘속수(束脩, 제자)와 다를 바 없다’고 밝혔다. 이는 응와의 겸손에서 나온 것으로, 25세 때 15세 연하로서 선배 학자로의 만남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응와의 학문 연원은 입재 정종로와 대산 이상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안동 행차는 만년인 69세 때도 있었다.

하회의 겸암정(謙菴亭)과 안동의 대표적인 정자인 영호루(映湖樓)에 올라 차운시를 지었다. 만우정(晩愚亭)으로 정재 류치명을 찾아 유림들과 함께 대산을 배향한 고산서원에 모여 학문을 강론했다.

천자문(千字文)에 보면 ‘학우등사(學優登仕)’라는 구절이 있다. 충분히 공부를 한 뒤 비로소 벼슬에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 다음 구절이 ‘섭직종정(攝職從政)’이다. 직무를 맡아 정치를 한다는 말이다.

응와의 학문 이력을 보면 이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가 20세 때 지었다는 독서유감(讀書有感)이란 작품에서 ‘독서는 깊이 잠겨야 비로소 나의 것이니/ 학문은 모름지기 방심하지 않아야 하네.’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응와집을 읽으면서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영남 학풍에 대한 신랄한 자기 반성문을 읽었을 때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해의 여지도 있는 내용이지만, 응와의 분명한 학맥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넓은 학문적 안목이요 분명한 자기반성이다.

“기호(畿湖) 학자들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결점이 없을 수 없고, 영남(嶺南) 학자들은 오로지 답습(踏襲)만 일삼아 전혀 참신(斬新)함이 없다. 답습하여 참된 안목을 가지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득(自得)하여 다소간의 하자(瑕疵)가 있는 것이 낫다.

얼핏 보면 길을 따라가고 바퀴자국을 지켜 오로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전통을 따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공허한 말일 따름이니, 남에게 베풀어도 증세에 따라 처방하는 이익이 없고 스스로 보존하고 있어도 심신(心身)으로 체인(體認)하는 효과가 없다.”

사색을 통해 자기화 하지 않은 지식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적시한 내용이다. 성현의 말씀에 근거해 이를 심신에 체험하는 일종의 ‘창의적인 학문태도’를 강조했다. 응와는 평생 학문을 한 사람이다.

그는 76세 때 한강 정구 선생을 배향한 회연서원에서 대학(大學)을 강의했고, 77세 때는 퇴계의 이학통록(理學通錄)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의 이러한 쉼 없는 학문 연구의 원천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를 문과 이후 벼슬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10년간 집중적으로 공부한 데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응와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8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대략 60년간을 조적(朝籍)에 이름을 올린 채 보냈다. 그는 과거 급제 60주년을 맞아 조정에서 한 등급 직급을 올려주는 영광도 입었다. 이를 ‘회방(回榜)’이라 한다.

 

그러나 그 동안 조정에 있는 날 보다 고향에 물러나 있던 날이 많았다. 사람들은 응와의 이러한 태도를 ‘한운지월(閒雲之月)과 서세지봉(瑞世之鳳)’으로 비유했다. 응와는 내직에 있을 때 경연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100여회나 경연에 입시한 것이 그 정도를 말해준다. 경연관은 학문에 뛰어난 학자 출신 관료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지방 수령을 맡아 체험적 학문으로 이룬 경륜(經綸)을 구현했다.

결성현감(10개월), 강릉부사(10개월), 제주목사(28개월), 자산부사(21개월), 경주부윤(12개월) 등 6년 9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렇지만 문과 급제 뒤 62년에 비하면 10%에 불과하다. 응와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폈지만 그 가운데 제주목사 재임 시 편찬한 고을 역사책인 탐라록(耽羅錄),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관보록(耽羅關報錄), 탐라계록(耽羅啓錄) 등은 오늘날까지 제주의 역사를 연구할 때 주요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강원도 삼척 부근을 지나다 지은 ‘미역 따는 아낙(採藿女)’라는 작품은 그가 얼마나 백성들의 어려움에 눈길을 주고 있었던가를 알게 한다.

 

 

 “미역 따는 저 아낙이여/떨어진 옷 팔꿈치도 못 가리고/짧은 머린 어깨 겨우 덮었네/한손엔 갈구리 한손엔 대광주리/아침 내내 따서 한 푼 돈과 바꾸려 하네/미역은 싸고 쌀은 귀하니 이를 어쩌나/금년에도 호남의 쌀 실은 배 오지를 않네/집으로 가 나물 뜯어 아침을 떼우고/황금같이 귀한 미역 조각 또 말리네/앞집서 보리 빌고 뒷집서 소금 꾸는데/바다는 거칠고 논밭은 황폐하니 모두가 가련하구나.”

 

응와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06년에 경북대 퇴계연구소에서 편한 ‘응와 이원조의 삶과 학문’을 보면 된다.

응와의 학문 연원을 계승한 한주 이진상에 대해서는 역시 경북대 퇴계연구소에서 편한 ‘한주 이진상 연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학자로서의 면모는 26권의 문집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주간한국 2007년8월21일자 종택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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