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우씨 월촌 종중의 상징 장지산 송림
임란 의병장 우배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의로운 말을 기리는 의마비
월곡 우배선 선생 동상
우배선 등을 기리는 낙동서원
월촌 종중이 사비로 건립한 월곡역사박물관
우배선선생의 임란 창의비
1970년대 지금의 상인동 일대
임란 의병장 우배선선생과 월곡역사공원의 장지산 송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등 대구에는 많은 공원이 있다. 그러나 그 중 특별한 공원을 말하라고 한다면 달서구 상인동의 ‘월곡역사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면적이 넓어서도, 편의시설이 잘 설치되어서도 아니다. 망우당공원처럼 공원이름에 특정인의 아호를 붙여서도 아니다. 거의 모든 토지 소유자들이 땅값이 저렴하고 이용에 제한이 따른 녹지를 해제 달라고 아우성인데 비해 이 공원은 문중이 먼저 공원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구해 조성한 공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의로운 말(馬)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공원 한 모서리에 1986년 세운 의마비(義馬碑, 비문 우억기, 글씨 우종묵)가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약 400여 년 전 당시 조암평야(현, 월성동 일대)에 야생마가 서식하고 있었다. 그 중 1필은 성질이 몹시 사나워 아무도 접근치 못했다. 그러나 월곡 우배선 선생이 달랬더니 순순히 따라 애마로 삼아 조련하였다.
훗날 임란 때 공이 백의로 창의, 대구근교 등 각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때 적의 총탄이 쏟아져도 애마의 기민한 동작으로 위기를 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이 평정된 후 공이 선무1등공신에 서훈되고 훗날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서거하니 말이 먹이를 마다하고 슬피 울다 3일 만에 순사하였다. 주민들이 주인을 위한 충의지절을 가상히 여겨 의마(義馬)라 이름 짓고 장지산록에 매장하고 그 무덤을 의마총(義馬塚)이라하였다.
그 후 수백 년이 흘러 일제말기 저수지 확장공사로 의마총이 수몰되었다. 이 의로운 말을 두고 ‘인간사회에도 윤리를 모르고 충의를 저버린 예가 허다한데 이성이 없는 짐승인 야생마가 영걸을 알아보고 복종하며 충성으로 국난극복에 공헌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인의 죽자 3일 만에 따라 죽으니 그 충의와 절개를 어찌 한 마리 말이라고 하여 소홀 하리오 하였다.’
따라서 그 정신을 만세에 전하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글로 새겨 빗돌을 세운다는 것이다.
공은 본관이 단양(丹陽)으로 아버지 우성덕과 어머니 아산 장씨 사이에서 1569년(선조 2) 이곳 월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후 두 살 때 부모를 잃고 조모 손에서 자랐으며 5세 때 청도 외가로 가서 자라다가 17세에 돌아와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5월 23일 가재를 털어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의병을 모집, 화원, 비슬산 등에서 주로 유격전으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하였다.
이에 초토사 김성일의 천거로 예빈시 참봉에 기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용감히 싸웠으며, 군기시 판관과 이어서 합천, 금산, 마지막 낙안군수, 겸사복장(兼司僕將)을 거쳐 조정이 혼란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열락당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그 후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책록 되고, 1621년(광해군 13) 53세로 돌아가셨다. 낙동서원에 제향 되고, 유물 중 의병진관련자료, 교지, 간찰 등 34점이 보물(제1334호)로 지정 되었다.
상인동 월촌 마을일대는 80년대만 하드라도 한적한 농촌이었다. 명문 단양 우 씨들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정권이 교체될 때 화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정착한 집성촌이다. 월곡역사공원 건립을 주도한 분은 당시 대구향교 전교로 있으면서 유학진흥에도 힘썼던 우억기씨였다.
공원 이름이 시사(示唆)하듯 ‘월곡역사박물관’, ‘월곡우선생창의유적비’, ‘우배선장군상’ 등 우배선 선생을 기리는 유적이 많다.
그 외에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민족정기탑’ ‘낙동서원’ 등이 있어 단양 우 씨들의 문중사와 의병장 우배선의 의병활동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말의 해를 맞아 의로운 말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가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중중 완의(完議, 규약)에는 ‘선조의 유적을 보호하는데 나무하나 토석하나라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박물관 앞 장지산의 울창한 송림은 600여 년을 이곳에 살아온 단양 우씨 월촌 종중 절의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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