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칠곡향교의 연혁 고(考)

이정웅 2014. 5. 13. 05:42

 

 

칠곡향교의 연혁 고(考)

 

 

 

 

대구광역시에는 칠곡향교를 비롯해 대구향교, 현풍학교 등 세 개의 향교가 있다. 그러나 세 향교 모두 건립연도가 정확하지 않다. 오랜 세월과 잦은 전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체계적으로 문서를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칠곡향교 대성전

 

대구향교의 경우에도 1398년(태조 7) 지금의 중구 교동(일명 양키시장부근)에 지은 것으로 추정은 하고 있으나 기록으로 증명할 수 없으며, 임란 중 소실되었던 것을 1599년(선조 32) 관찰사 한준겸(韓俊謙)과 부사 김구정(金九鼎)이 달성(현 달성공원)으로 이건하였으나 뱀과 전갈이 들끓자 다시 관찰사 겸 부사 유영순(柳永詢)이 원래 장소인 교동으로 1605년(선조 32) 다시 옮겨지었다고 한다.

그 후 교동에서 3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오다가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지사 김서규(金瑞圭)와 군수 박제륜(朴濟輪), 직원(直員) 전병곤(全柄坤)이 1932년 지금의 장소로 이건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현풍향교 역시 1750년(영조 26) 대성전이 지어진 것은 확실하나 명륜당 등 부속 건물을 지은 것은 영조(재위기간, 1724~1776) 때인 것으로만 짐작하고 있다. 이런 점은 칠곡향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칠곡향교지(2001, 칠곡향교)> 연혁 편에 의하면

‘---이상과 같이 치군에 관할소속 명칭 변경을 고찰해 볼 때 칠곡향교의 창설은 인조 경신 서기 1640년 가산에 축성을 하고 도호부를 설치하야 명호를 칠곡(漆谷)이라 했으니 전 교지(校誌)에는 그 당시로 추측된다고 하나 또 <칠곡읍지>에는 향교는 관아 북쪽 벽송정(碧松亭) 하에 있는데 명륜당이 6칸이요 좌우 협실이 2칸이며 동재가 3칸이요 서재도 3칸이며 장외(牆外)에는 양현청과 주고(廚庫)가 있었다고 하니 현재 있는 건물은 순조 기묘(己卯) 서기 1819년 도호부를 이치하고 3년 후가 임오 임으로 하마비(下馬碑)가 임오로 되어 있어 1819년으로 추측 된다’

 

 

고 하여 도호부 관아를 읍내로 옮기고 향교를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글은 두 가지 점을 간과하고 있다.

 

 

 

                                                                     칠곡향교 명륜당

 

 

첫째는 60년 만에 돌아오는 임오년을 어느 해로 보느냐 이고

둘째는 칠곡향교가 산성 안 도호부의 관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볼 것이냐 읍내로 내려오고 난 후에 건립된 것으로 볼 것이냐이다.

우선 첫 번째 쟁점인 임오년에 대하여 <칠곡향교지>는 도호부의 관아가 읍내로 내려 온 1819년으로부터 3년 후인 1822년(순조 22) 임오년에 향교가 창건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양직당 도성유(都聖兪, 1571~1649)의 행장을 보면 당시 향교를 지을 땅이 양직당의 소유로 그것을 팔라고 하자 ‘문묘(文廟), 즉 향교를 세우는데 어찌 팔라는 말을 하는 가’라고 하며 대가 없이 희사했다고 하는 기록을 볼 때 공이 살아있을 때 부지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공이 78 세로 돌아가셨는데 생애 중 임오년이 두 번 있었다. 땅을 희사할 때 어느 정도 연세가 들었을 것을 감안하면 71세 때인 1642년(인조 20) 임오년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따라서 칠곡향교는 1642년 임오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정설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인 향교가 산성 안에 있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도 고증하기에 는 사료가 부족하다.

특히 <칠곡읍지>의 ‘관아 북쪽’이라는 표현이 더욱 혼란스럽다. 자구 그대로 라면 산성 안에 지은 관아 북쪽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표현을 관아가 읍내로 내로 온 이후 관아의 ‘북쪽’으로 보면 해석은 간단하다. 즉 <칠곡읍지>가 관아가 읍내로 내려 온 13년 후인 1832년(순조 32)에 쓰여 졌기 때문에 그 시점 즉 읍지를 편찬할 당시의 관아 북쪽은 현 향교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칠곡향교는 본래부터 처음 관아가 있었던 산성 안과 떨어진 읍내에 지은 것이다. 왜냐하면 산성 안은 지나치게 가파르기 때문에 주민들이 왕래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칠곡향교는 칠곡도호부가 설치된 3년 후 임오년인 1642년(인조 20)에 지금의 자리에 창건된 것이다.

특히, <경북향교지, 1991, 경상북도·영남대학교>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1642년 4월 10일 건설되었다고 한다.

칠곡향교는 대구광역시 안에 있는 세 개의 향교 중에서 비록 규모면에서는 대구향교에 뒤지나 향교의 중심공간인 대성전은 대구향교는 물론 현풍향교보다 더 오래되었다. 이 점은 칠곡향교의 또 다른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