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사를 지낸 응와 이원조 초상화 ,공은 말년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주 목사 재임 시 제주에서 귤나무 3그루를 가져와 3형제에게 각기 선물했는데 2그루는 죽고 막내 아들 것만 살았다. 그러나 현재의 것은 탱자나무이다. 남귤북지의 현상일까
탱자나무 수관부
노랗게 익은 탱자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교리댁 입구
교리댁 사랑해
한국판 남귤북지(南橘北枳)의 현장 성주 한개마을 교리댁 탱자나무와
응와 이원조선생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대포(大浦)는 한개마을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600여 년 전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개척한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으로 마을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제255호)이다. 유학자, 독립운동가, 기업인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그 중에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와 공의 조카이자 서경덕, 이황, 이이, 기정진, 임성주와 더불어 조선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응와는 약관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서인이 집권할 때라 초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남인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공조판서까지 오른 분이다.
1841년(헌종 7년) 50세에 제주목사가 되어 헌종으로부터 유서통(諭書筒)을 하사받아 제주도정의 전권을 위임받고, 선참후계(先斬後啓, 군율을 어긴 죄인을 먼저 처형하고 뒤에 임금께 아뢰는 제도)의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서원과 서당을 활성화시켜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귀양 와 있던 추사 김정희에게 교학(敎學)에 힘써 줄 것을 부탁드리고 유배생활 중에도 제주 문풍을 진작시킨 동계 정온(桐溪 鄭蘊)을 기리는 서원을 세우고, 군졸들에게 훈련을 강화시켜 전투력을 높이는 한편 무당들의 푸닥거리를 금지시켜 미신을 타파하였다.
그러나 더 특별한 일은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제주의 또 다른 명소 우도를 개방했다. 일설에는 1844년(헌종 10) 김석린 진사가 들어가 개척했다고 하나 그 이전인 1842년(헌종 8) 장계(狀啓)를 올려 1697년(숙종 23)설치되었으나 황폐해진 국영 말목장을 폐쇄시킴으로 주민들의 출입이 자유로워 농업과 어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도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기념비라도 하나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귤나무 3그루를 가져와 3명의 아들에게 각기 한 그루씩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그 중 2그루는 죽고 1882년(고종 19) 장원 급제한 셋째 아들 귀상(龜相)에게 준 것이 한개마을 교리댁에 남아 한국판 남귤북지(南橘北枳)현장이 되었다. 이 고사성어는 제나라 재상 안영과 초나라 임금 영왕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안영(晏嬰)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나라 영왕(靈王)이 사신으로 방문한 그의 앞에 도둑질을 하다 잡힌 한 죄인을 불러 놓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죄인은 ‘제나라 사람’이라고 답했다. 영왕은 안영을 바라보며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하느냐’며 비웃듯 말했다. 그러자 안영은 ‘강남 쪽의 귤을 강북 쪽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은 환경 때문입니다. 저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도둑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을 보면 초나라의 정치가 어지럽기 때문인가 봅니다’라고 받아쳤다. 이에 영왕(靈王)은 안영(晏嬰)의 지혜로움에 탄복하고, 크게 잔치를 열어 환대했다고 한다. ”
이 고사는 사람은 물론 나무도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지만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즉 두 나무는 유전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귤나무가 탱자나무가 될 수 없다. 이 오류는 나무를 활용하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좋은 감을 얻기 위해 고염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이듯이 좋은 귤을 얻기 위해서는 탱자나무에 접붙여야 한다.
따라서 난대 수종인 귤나무를 북쪽에 옮겨 심으면 추위를 견디지 못해 얼어 죽지만 대목으로 사용한 탱자나무는 싹이 터서 자라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즉 응와가 제주에서 가져온 귤나무의 줄기는 육지 성주의 추위를 감당하지 못해 죽고 대목(臺木)으로 사용했던 탱자나무의 둥치에서 싹이 터서 자랐다. 이런 연유로 성주 한개마을의 탱자나무는 2,500 여 년 전, 중국 춘추시대의 이야기 남귤북지의 한국판 현장이 되었고, 제주에서의 2년 4개월, 목민관을 지낸 물증이 되었다. 또한 응와는 재임 중 <탐라록>, <탐라지 초본> 등을 저술하여 19세기 제주전반의 역사, 민속, 풍물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 책은 종손 이수학이 2007년 제주교육관박물관에 기증함으로서 제주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겟신부의 왕벚나무 만개 (0) | 2016.03.30 |
---|---|
제주목사 노촌 이약동과 산천단 곰솔 (0) | 2015.12.14 |
광주 포충사에서 만난 안동 학봉 종손의 기념식수 주목(朱木) (0) | 2015.09.23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왕벚나무를 발견한 다겟 신부와 천주교대구교구청의 왕벚나무 (0) | 2015.09.15 |
하멜(Hendric Hamel) 일행과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 (0) | 2015.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