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산천단 주변의 곰솔 (찬연기념물 제160호) 7그루
제주 곰솔 1그루
이약동 목사가 평지로 옮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준 산천단 (제주 기념물 제66호)
제단
이약동 목사 기적비
천연기념물 표석
하로서원 청백사
제주목사 이약동선생과 한라산신제단 곰솔
제주목사로 재임했던 많은 목민관 중에는 선정으로 칭송을 받은 분도 있지만 가렴주구를 일삼은 탐관오리도 있었다. 그 중에서 이약동(李約東, 1416~1493)은 좀 특별한 사람으로 전자를 대표하는 목사의 한 사람이다.
공이 특별한 이유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스스로 찾아 해결하여 민폐를 줄이고 공사(公私)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그 한 예가 어느 목사도 도모하지 못했던 산신제(山神祭)를 산 정상에서 아래로 옮겨 지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삼산오악(三山五岳)에서 보듯이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신(山神)에 제사를 지내왔다. 특히, 험한 바다를 상대로 고기를 잡고, 척박한 농토를 일구며 사는 제주도는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지내왔으며 그 시기가 혹한기인 2월이었다.
이때는 날씨도 춥고, 바람이 불며, 눈 오는 날이 많았다. 따라서 제물을 옮기는 사람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심지어 얼어 죽거나 부상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때론 눈보라로 올라 갈 수 없어 지내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이러한 도민(島民)들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한라산이 잘 보이는 평지로 제단을 옮겼다. 즉 한라산의 지맥이 뻗어 내린 곳으로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곳이었다.
그 이후 산신제를 이곳에 올리게 되니 곧 지금의 제주시 516로 3041-24에 있는 한라산신제단(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7호)이 그것이다.
공은 김천 출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아호는 노촌(老村)이며 아버지 증 호조판서 덕손(德孫)과 어머니 유무(柳務)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 등과 더불어 야은 길재로부터 성리학을 배운 김숙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문과에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황간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 해 사직했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아전(衙前)들의 부정행위를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자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극히 만류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평소 들고 다니던 말채찍마저 관물이라고 성루에 걸어놓고 왔다.
세월이 지나 그 말채찍이 썩자 그림을 그려 은덕을 기렸으며, 심한 풍랑으로 배가 파선의 위기에 놓이자 이는 필시 하늘을 속인 노여움의 기미라며 배 안을 뒤져 부하들이 몰래 가져온 갑옷을 찾아 바다에 던지니 훗날 사람들은 이 바다를 ‘갑옷을 버린 곳’ 이라 하여 투갑연(投甲淵)이라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1474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성종 22)에 지중추부사를 마지막으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하였다.
1493년(성종 24) 졸하니 성종은 조회를 중지하여 부의를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청렴하다고 일컬어졌다>고 했다.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현, 하로서원), 제주도 귤림서원에 제향 되었다. 청백리로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저서로는 <노촌실기>가 있다.
공은 한라산신단을 만들면서 단(壇) 주변에 곰솔을 심었다. 곰솔은 수피가 검어 흑송(黑松)이라고도 하고, 소금기 많은 바닷가에도 잘 자라 해송(海松)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특성을 고려한 수종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성 당시 단(壇)과 그 주변을 빙 둘러 심었을 것이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8그루뿐이다.
높이가 평균 20여 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곰솔이자 수령이 500~600여 년으로 나이가 가장 많은 나무로 알려져 천연기념물(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목사의 청백과 애민정신은 사서의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만 한라산신제단과 곰솔로 더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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