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마을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1리
대과수 처음 왕버들 9그루를 심었으나 지금은 5그루가 남았다
1600년에 건립된 풍산 김씨 종택 허백당 전경
오미광복운동 기념탑 일제 강점기 이 마을에서만 2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수필의 아버지라는 납북문인 김진섭문학비
구수정
마을 안내표석
허백당 큰 사랑채
팔연오계의 마을 안동 오미리의 대과수(大科樹)
경북 도청사가 새로 자리 잡은 곳의 주산 검무산의 뒤쪽이 마을이 명문 풍산 김씨 집성촌 오미(五美)1 리 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 때 풍산백에 봉해진 김문적(金文迪)으로 8세 손 김자순(金子純)이 형 병조판서 김자량이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화를 입자 이곳으로 피해 들어왔다고 한다. 원래 오릉(五陵), 오묘(五畝)라고 불렀으나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팔연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한데서 오미동이라 했다. 팔연오계 주인공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봉조(奉祖)는 1613년(광해군 5) 문과에 급제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 중국의 왕조에 바치는 공물과 왕의 하사품을 관리하는 기관의 책임자 정3품)을 지냈고 <학호문집>을 남겼으며 영주의 구호서원(鷗湖書院)에 제향 되었다.
둘째, 영조(榮祖) 역시 형보다 1년 빠른 1612년(광해군 4)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대사성,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6차례나 어사로 나아갔으며 저서로 <망와집>이 있다.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 되었다. 처의 아버지가 학봉 김성일이다.
셋째 창조 (昌祖) 1605년(선조 38)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내고 저서로 <장암집>을 남겼다.
넷째, 경조(慶祖)는 1609년(공해군 1)생원시에 합격하고 의령, 이산현감 (縣監)을 지냈다. 재직 시절 고을을 잘 다스려서 관찰사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다섯째, 연조(延祖)는 1612년(광해군 4)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으며, 예문관한림에 천거된 상태에서 병이 들어 만 2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문집으로 <광록문집(廣麓文集)>이 전한다.
여섯째 응조(應祖)는 1623년(인조 1)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 한성부우윤(右尹)을 지내고 인조, 효종, 현종 3임금을 모셨다. 문장에 능했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주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학사집>, <산중록 山中錄>등이 있다.
일곱째 염조(念祖)는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공조좌랑을 거쳐 정산현감으로 있을 때, 향교를 옮겨 짓고 마을의 우수한 인재를 골라 그 안에 거주케 하여 실력을 키우도록 하니 선비들이 많이 분발하였다. 이어 익위사복시주부(翊衛司僕寺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안산군수로 가서 공자묘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정랑, 사복시첨정, 종친부전적(宗親府典籍) 등을 역임하였다.여덟째 숭조(崇祖,)는 1629년(인조 7)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다.
한 가문에 8형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진사,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중에5명이 대과에 급제했다는 사실은 왕으로부터 칭찬들을 만한 일이다.
유연당에게는 슬하에는 모두 9명이 자제가 있었다. 임란의 화는 이곳도 피해갈 수 없어 처음 오미리를 개척한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이 1528년(중종 23)에 건립한 종택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에 유연당은 1600년(선조 33) 맏이인 봉조에게 종택을 보수하게 하고 마을 왼쪽의 아미산의 허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비보(裨補)로 숲을 조성하게 하면서 9형제를 기려 9그루의 왕버들을 심게 했다.
이후 이 길은 9그루의 나무가 있는 길이라고 하여 구수목가(九樹木街)라고 불렀으나 음이 변하여 '구시나무거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공교로운 것은 8째 아들 술조(述祖)가 17세 약관에 낙동강에서 선유를 즐기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1그루가 아무런 이유 없이 죽었고, 그 후 세월이 지나자 다시 3그루가 죽으니 현재 5그루만 남았다. 이 5그루는 대과 합격자와 일치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대과목(大科木)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동구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옆에 나란히 서 있고 그 가운데 구수목정자와 한국 수필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납북문인 김진섭(金晉燮, 1903~?)을 기리는 문학비가 있다. 안동시가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후손들도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있다.
이 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이 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그 암울했던 시기에 풍산 김씨들은 2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마을 서편 북경재 언덕에 오미광복운동기념탑을 세우고 24명의 약력을 돌에 새겨놓았다. 팔연오계는 생원·진사 방(榜)을 연꽃을 상징하는 연방(蓮榜)이라 하고, 대과 방(榜)을 계수나무를 상징하는 계방(桂榜)이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방(榜)은 과거합격자의 이름을 적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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