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해공 신익희 선생과 청양 모덕사 잣나무

이정웅 2016. 5. 16. 21:40

 

해공 선생이 환도기념고유제를 재내고 심은 모덕사 경내의 잣나무

해공 신익희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부분)

최익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모덕사

 

뿌리 부분, 생육공간이 좁아서 영양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것 같다.

면암선생이 기거했던 중화당

 

 

해공 신익희 선생과 청양 모덕사 잣나무

충남 청양군은 ‘콩 밭 매는 아낙네야···로 ’ 시작하는 칠갑산의 노래로 잘 알려진 고장이다.

뿐만 아니라 구기자와 청양고추로도 유명한 한곳이다. 그러나 청양은 질 좋은 고추를 많이 생산하지만 매운 맛의 청양고추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경북 청송과 영양지방에서 재배한 고추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품종이라고 한다.

청양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는 숨은 보석은 오히려 모덕사(慕德祠)이다. 사당은 조선말기 애국지사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모덕(慕德)은 고종의 밀지(密旨) 간우공극 모경숙덕(艱虞孔棘 慕卿宿德) 즉 ‘나라 일이 어지러움에 경의 높은 덕을 사모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 초순 모덕사를 찾았다.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출신지가 경기도 포천인 면암선생의 사당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퍽 이외였다.

가이드에 의하면 68세 때인 1900년 경주 최씨들의 집성촌인 이곳(청양군 목면, 송암리 장구동)으로 왔다고 한다. 위패를 모신 모덕사 이외에도 영정을 봉안한 성충사, 기거하던 중화당, 유물을 전시하는 대의관, 서책과 서간문을 보관하는 춘추각이 있고 넓은 마당에는 동상(銅像)도 있었다. 주변경치가 아름답고 반듯한 건물과 함께 경내는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인상적인 나무가 모덕사 경내에 있어 살펴보았더니 대통령 후보였다가 승리를 목전에 두고 돌아가신 해공 신익히(1894~1956) 선생이 방문 기념으로 심은 잣나무였다.

나무를 심은 해공은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막내로 태어났다.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유학 시절 『학지광』(學之光)이라는 잡지 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3년 귀국하여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부터는 보성전문학교의 전신인 보성법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 등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만주·북경·상해 등에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일본유학생친목단체인 유일학회친목회(留日學會親睦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총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했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국민대학 학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도 맡았다. 그 뒤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제헌국회에 진출하였고,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이승만이 사사오입개헌까지 자행하자 1955년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6년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무수한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5월 5일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185만여 추모표가 던져졌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참고자료, 민족대백과사전, 일부 첨삭>

기념표석에 의하면 1953년 3월 13일 국회의장으로 재직할 때 환도고유제(還都告由祭)를 이곳에서 지내고 심었다. 한국동란 시 수도 서울이 북한에 수중에 있다가 수복된 것을 고하는 제를 왜 이곳에서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5~6년생을 심었다면 수령이 70년 정도이다. 그러나 키만 클 뿐 가지가 무성하지 않았다. 관리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으나 원래 좁은 공간에 심어져서 뿌리 발육이 충분하지 못하고 영양이 부족한 것 같다.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