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수령 630여 년의 나주 향교 대성전의 은행나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제317호, 출처 문화재청)
나주 향교 대성전(보물 제394호), 흙벽을 중국 곡부에서 가져 왔으며 임란 때 서울의 성균관 대성전이 불타자 이 대성전을 보고 복원했다고 한다.
나주 향교 강당 명륜당
나주 향교 서재
나주 향교 동재
태조 이성계와 나주향교 대성전의 은행나무
카페 ‘나무를 찾아서 나를 찾아서’ 회원들과 함께 호남의 웅부(雄府) 나주를 찾았다. 나무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흔들리는 나를 다잡아 바르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나무뿐만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서 다른 지역의 정서를 이해해보려는 뜻도 있다.
주로 대구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답사 대상지는 전국이다. 해남에 이어 두 번째 남도답사였다. 88고속도로가 확장, 직선화되어 남도여행이 한결 수월해 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주에서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고봉 기대승 등 7분을 제향하는 경현서원과 국내에서는 가장 크다는 나주향교, 나주목 객사인 금성관, 고려 2대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유적지 완사천, 임란 선무원종일등공신 오득린이 심은 호랑가시나무, 16세기 개혁정치가 조광조를 지지하던 나주지역의 선비 임붕을 비롯한 11명의 결사체인 금강계(錦江契) 회원들이 심은 전국 최대의 동백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특히, 경현서원은 나주 최초의 서원이기도 하지만, 정암과 고봉을 제외한 나머지 5분이 경상도와 연관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서원을 통해 동서지역 인사들의 교류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훤당의 대구 도동서원, 일두의 함양 남계서원, 회재의 경주 옥산서원, 퇴계의 안동 도산서원, 학봉의 안동 임천서원에 배향된 후손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매년 한 두 번씩 초청해 참배하게 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들린 곳이 경현서원이었다. 서원의 기능이 쇠퇴해진 오늘 날 전국의 거의 대다수 서원이 그렇듯 최근 단장 한 것으로 보이는 사당 경현사(景賢祠) 이외에는 관리가 부실한 것 같아 다소 아쉬웠다. 또 큰 길에서부터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안내판도 없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두 번째는 나주향교였다. 여느 향교와 달리 대성전(보물 제349호)이 앞에 있고 강당이 뒤에 배치 된 전묘후학 형태로 1398년(태조 7)에 지어졌다고 한다.
임란으로 서울의 성균관 대성전이 불타자 나주 향교 대성전을 보고 복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무에 대한 스토리를 개발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명륜당 앞의 500년 된 비자나무도 큰 관심거리이지만 대성전 앞의 600년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더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는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가 심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화관광해설사(이향?)에 의하면 언제, 어떤 연유로 태조 이성계가 심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오래전부터 그렇게 알려지고 있다고 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심은 것으로 알려진 나무는 전북, 진안의 마이산 은수사에 있는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가 있다.
그곳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100일 기도를 하던 중 꿈속에서 금으로 된 자, 금척(金尺)을 받았다고 한다. 자는 물건을 재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재는 의미이기도 해 새로운 세상을 재단(裁斷) 즉 건설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뻐서 심은 배의 씨앗이 자란 것이라고 한다.’
나주에서는 태조 이성계에 대한 이런 유사한 전설도 없다. 굳이 인연을 찾는다면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도전이 나주에 유배생활을 한 것은 1375년(우왕 1)부터 1377년(우왕 3) 약 2년간이다. 이때에는 태조 이성계와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비록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이 그려준 설계를 바탕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서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이 함흥에 있는 군영을 찾아가 이성계를 만난 것은 유배에서 풀려 난 후인 1383년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였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두고 유추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는 첫째 아직 왕이 되기 전 나주지역을 침범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방문했을 때 심은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둘째는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한 후 정도전이 유배생활을 하던 나주를 구경삼아 왔다가 기념으로 심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수령으로 환산해 보면 전자가 더 타당성이 있다.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두 사안 다 정사(正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망즈 주교와 대구교구청의 뽕나무 (0) | 2016.05.31 |
---|---|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꽃문화와 문희목씨댁의 백화등 (0) | 2016.05.26 |
해공 신익희 선생과 청양 모덕사 잣나무 (0) | 2016.05.16 |
팔연오계의 마을 안동 오미리의 대과수(大科樹) (0) | 2016.04.29 |
다겟신부의 왕벚나무 만개 (0) | 2016.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