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청 내 녹지의 뽕나무, 초대 천주교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는 고아원을 운영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쳐서 경비를 조달했다고 한다.
드망즈 주교 동상(부분)
루르드 성모굴을 본 따 만든 성모당(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
드망즈 주교가 운영한 백백합 보육원과 아이들
1915년대의 대구교구청사
드망즈 주교와 대구교구청의 뽕나무
대구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8년 로베르(우리말 이름 김보록(金保祿)신부가 칠곡의 신나무골에서 서구 새방골로 옮겨 오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계산동에 한국식 십자형 성당을 신축하였으나 지진으로 건물이 전소되자 1902년 새로 지은 것이 오늘날의 계산성당이다.
이때까지 대구는 물론 우리니라 전역의 천주교 행정은 서울의 조선대목구가 담당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분리되면서 조선대목구는 이름을 경성대목구로 바뀌고 대구는 우리나라에서 서울 다음 천주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초대 교구장으로 불란서 출신인 드망즈(Florian Demange, 1875~1938, 우리말 이름 안세화)주교가 부임했다.
그는 대구지역이 천주교를 포교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임을 알고 첫째 신부들이 거처할 집과 대지를 확보하는 것과 둘째 신학교 건립, 셋째 계산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 빌면서 이 3가지가 완성되면 주교관 내 가장 이름다운 곳에 루르드 성모굴과 유사한 동굴을 만들어 교우들이 기도하는 장소로 만들겠다고 했다고 한다.
성모당(聖母堂, 대구시 유형문화재 29호)은 안 주교가 바랐던 일들이 모두 완성되자 1918년 지어진 성소(聖所)다.
그는 한편으로는 교세를 확장하는 이외 아이들 50명을 대상으로 보육원도 운영했다.
그러나 식량과 생필품이 절대 부족했던 시기 먹이고 입히며 공부를 가르치는 일에 필요한 경비를 확보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녀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밭에 목화를 심어 물레로 목화씨를 뽑아 무병 베를 짜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이야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무의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안 주교의 박애정신이 깃던 이 뽕나무가 교구청 어느 곳에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구교구청부지는 100여 년 전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었던 서상돈이 기증했고 그 이후 교구청의 부속 건물 이외 다른 큰 시설이 들어서지 않아 녹지가 잘 보전된 곳이기 때문이다. 넓은 교구청은 성직자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대구시민의 휴식처일 만큼 자연 상태가 양호한 공간이다.
또한 이곳에는 서상돈이 심은 히말라야시다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왕벚나무를 발견한 다겟 신부가 심은 왕벚나무가 있어 이것만으로도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 볼만한 곳인데 안 주교가 심은 나무까지 있다면 이야기가 한결 풍요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빨리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잎이 무성해지는 5월쯤 언젠가 한 번 찾아 샅샅이 뒤져보기로 마음 먹었었을 뿐 아니라, 지인 중 나무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교구청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으면 뽕나무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찾았다는 사람도 없었고 다른 일로 차일피일하다가 5월 하순을 맞아 교구청을 찾았다.
헤매기를 한참 하는데 누군가 효성여고가 있었던 곳으로 가보라고 해 그곳도 한 바퀴 돌아보았으나 없었다. 다시 안익사를 지나 성모당에 가서 안 주교의 동상을 보고 다시 내려오는데 언덕 아래 생각했던 것 보다 작은 뽕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재임(1911~1938) 중 심었다면 나무가 클 것으로 상상했었는데 이외였다. 주변에 썩은 그루터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때 심은 것에서 맹아가 자라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뽕나무임은 분명했다.
조경수로 뽕나무를 심는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음으로 누가 일부러 심은 것은 아닐 터인데 어떤 연유로 여겨와 있을까.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능력으로 새들로 하여금 다른 곳에서 오디를 따 먹게 하고 이곳에 와서 배설하게 하여 나무가 자라면 주교님을 기리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안 주교님이 이 뽕나무로 부활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생각이 엄숙해졌다.
그러나 경위야 어떠하든 이 나무는 초대 천주교 대구 교구장으로 천주교 발전의 토대를 쌓으시고 대구최초의 아동복지시설 백백합보육원을 운영하여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을 보살핀 훌륭한 성직자를 기리는 비목(碑木)으로 삼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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