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가 심은 수령 800여 년의 녹나무
주자 고거
주자상
주자 묘
주자 어머니 묘
현장에서 만난 주자의 26대 후손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고거(朱熹古居)의 녹나무
칠곡향교 박성규 전교을 비롯한 향내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주자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성리학자 주자(朱子, 1130~1200)는 호가 회암(晦庵) 또는 운곡노인, 이름은 주희(朱熹)로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이자 사상가 이다.
그가 창시한 주자학(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여말(麗末)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다. 1290년 (충렬왕 16) 왕과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껴오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올 때부터라고 한다.
안향이 주자학에 얼마나 매료되었는가는 주자의 호 회암의 회(晦)자를 자호로 차용한데서 알 수 있다.
이후 백이정-이제현-이색-정몽주-정도전으로 이어져 조선의 관학(官學)으로 자리 잡고, 야은 길재가 금오산에 은거하며 김숙자, 김종직 부자(父子)를 가르치고 김굉필, 조광조 이이, 이황 등을 통해 계승되면서 조선 500여년은 물론 오늘날까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전국의 모든 향교에서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낼 뿐 아니라, 주세붕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도 주자가 중건한 백록동서원을 본 따서 만든 데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유학자들의 존숭의 대상이고 백성들의 관혼상제도 그 모테가 <주자가례>인 것을 감안하면 훨씬 광범위하다.
또한 <명심보감> <채근담>과 더불어 최고의 수신서(修身書)로 알려진 <소학> 역시 주자의 주도하에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완성한 책이라는 점에서 민족 정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구 북구 사수동의 한강 정구가 지은 사양정사의 당호가 경회당(景晦堂)인데 이는 회암을 존경하는 집이라는 뜻이고, 경주의 운곡서원, 운암동의 운곡서당 등은 회암의 또 다른 호 운곡(雲谷)에서 비롯된 것이며, 마을 이름 신안은 주자의 고향, 자양은 주자의 자양서당에서, 무이서원, 무이서당은 무이정사에서, 무흘구곡, 화양구곡 등 우리 선비들이 경영했던 구곡 원림은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따온 것이다.
주자의 생가와 무덤, 어머니 묘소, 강학처 고정서원, 흥현서원, 한 때 은거했던 무이정사, 무이구곡가의 탄생지 무이구곡은 복건성에 있다.
그러나 이런 흠모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찾는 회수는 중국의 다른 여행지보다 아주 적다고 한다. 따라서 무이시는 다른 도시와 달리 우리 돈이 거의 통용되지 아니하고, 음식도 현지 식당 이외 한(韓)식당은 없다.
주자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묘소 입구는 겨우 버스 한 대 들어갈 정도로 길이 좁고, 묘지도 2006년에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만 입구 화장실 안내를 한글로 병행 해 놓은 것이 이색적이었다. 아마 한국 사람들에 대한 배려인 것 같았다. 묘역은 매우 특이했다. 봉분은 물론 묘지 주변을 흔히 강가에 쉽게 찾을 수 있는 큰 고구마 정도의 돌멩이로 쌓았다. 곡부의 공자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준비한 제물(祭物)로 간단하게 예를 올렸다.
주자 어머니 묘는 현지 가이드도 위치를 몰라 몇 번의 수소문 끝에 도착했을 정도로 안내판도 없었다. 봉분이 다소 낮으나 재료는 주자 묘(墓)와 같았다. 주자가 6년 동안이나 시묘(侍墓)했다는 곳 치고는 주변을 너무 다듬지 않았다. 주자가 말년에 강학했다는 고정서원은 시간이 없어 생략하고 생가인 주희고거(朱熹古居)로 향했다.
집 바로 앞까지 버스가 갈 정도의 길이 있으나 그날따라 포장공사로 큰길에서 내려 한참 걸어갔다. 이곳의 더위도 대구 못지않았다. 땡 볕에 도착하니 이외로 초라했다. 마당 한쪽에는 몇 분의 노점상이 간간히 찾아오는 여행객을 상대로 잡화를 팔고 있었다. 아버지 주송(朱松)이 신안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집을 지키고 있던 안내인이 설명하고 가이드가 통역했다.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꽉 막혀있는 특이한 구조라 처마가 높고 대청이 큰 남향의 전망 좋은 우리들 사대부가와 완전히 달랐다.
바람이 어떻게 순환되는지 답답한 2층 구조였다. 고거답게 주변에 큰 나무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중에 주자가 심은 나무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물었더니 집 바깥 다소 먼 곳 개울 옆에 서 있는 큰 나무를 가리키며 주자가 심은 것이라고 했다. 이름을 물어보니 땅바닥에 향장목(香樟木)이라고 썼다.
귀국해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제주도 등 우리나라 남해안지대에서도 흔히 자라는 상록 교목의 녹나무라고 했다. 이역만리에 가서 위대한 성리학자 주희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령 800여 년의 녹나무를 만난 감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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