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명차 대홍포 어미나무 모두 6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큰 바위산 중턱 바위틈에 자라 특수한 성분이 차맛을 좋게 한다고 한다.
대홍포 각자
대홍포 보러 가는 길 오른쪽에 여러 종류의 차 전시포가 조성되어있다.
대홍포 보러 가는 입구 여러 사람의 글 씨, 서성 욍희지의 대홍포 찬양 글도 있다.
가운데가 필자
중국 최고의 명차 대홍포(大紅袍)와 모수(母樹)
중국 복건성의 건양시와 무이산은 한국 사람들이라면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성리학을 창시한 주희(朱熹)가 태어나고 제자를 가르치다가 돌아가신 곳이라는 점과 중국 최고의 명차 대홍포(大紅袍)의 생산지라는 점이 그렇다.
차(茶)의 본 고장 중국에는 많은 종류의 차가 있지만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이라고 한다.
첫째는 우리가 말하는 녹차로 대표적인 것은 용정차이며 그 다음은 발효차로 보이차가 그것이며 다음은 반 발효차로 우롱차가 그것이라고 한다.
무이산을 대표하는 차는 반발효의 우롱차 대홍포(大紅袍)로 지금도 이 차를 현지 사람들은 ‘다중지왕(茶中之王)이라고 부른다. 즉 차중에서 왕이라는 뜻이다.
대홍포가 명차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이름 없는 한 선비의 이야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어느 한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향하던 중 이 골짜기에서 이름 모를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
그 때 한 사람이 바위를 타고 올라가 이름 모를 나무의 잎을 따서 으깨어 즙을 마시게 했다. 그러자 그 선비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몸을 추스린 그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과거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그는 장원급제 했다. 그 후 그 선비는 그를 구해준 마을을 다시 찾았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를 살려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누구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찾아야겠다고 하니 마을사람들이 꼭 그렇게 은혜를 갚겠다면 저 나무라에 갚으라고 했다고 한다. 쳐다보니 높은 바위틈에 차나무가 있었다.
그 후 그는 황제를 찾아갔다. 당시 장원 급제자에게는 어사화(御史花)를 하사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붉은 큰 도포 즉 대홍포(大紅袍)를 하사했는데 황제의 하사품인 만큼 사사롭게 쓸 수 없다는 생각에서 황제에게 임의로 처분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황제는 너에게 준 것인 만큼 네가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다 그 길로 달려 온 그는 황제가 하사한 대홍포(大紅袍)를 차나무 위에 걸쳐두고 절을 하며 감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이후 이 차나무가 대홍포(大紅袍)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높은 절벽 중간 바위틈에 자라기 때문에 바위를 구성하고 있는 특수한 성분의 미네랄을 먹고 오랜 세월을 자랐기 때문에 효험이 특이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자 황실에 진상했다고 한다. 수령 300이 여 년이라고 하나, 원(元), 명(明), 청(淸) 3황조(皇朝)에 진상해다는 이야기가 있고, 입구 암벽에 대홍포를 예찬한 진(晋)나라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더 오래 된 것으로 보인다.
대홍포에 얽힌 또 다른 재미난 이야기 하나는 모택동과 닉슨대통령에 얽힌 에피소드다.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기 위해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모택동이 닉슨에게 방문 기념으로 대홍포 125그램을 을 선물했다고 한다. 세계 최강의 미국 대통령에게 주는 선물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닉슨도 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고 마음이 상했다. 이 때 닉슨의 표정을 읽은 수상 주은래가 말을 걸었다.
‘대홍포 모수(母樹)는 모두 6그루로 1년에 겨우 250그램이 생산되는데 당신께 선물한 125그램은 중국 땅의 반(半)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회담 분위기기 화기애애(和氣靄靄)해졌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홍포가 그 만큼 귀한 차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홍포를 보기 위해서는 양 쪽의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경관 또한 그저 그만이다. 왼쪽은 실개천이 흐르고 오른 쪽 다소 넓은 공간에는 여러 종류의 차나무 시험포가 있다.
대홍포 모수(母樹)는 길 맨 마지막에 있었다. 거대한 암벽에 누군가 계단을 만들어 나무가 잘 자라도록 건사해 놓았다. 먼데서 사진을 찍을 뿐 접근 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 황산 등반으로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다리가 더 불편했었는데 절뚝거리며 힘들게 올라간 보람이 있었다. 동행한 김정립 회장, 도성탁 교수, 박성규 칠곡향교 전교 등과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마지막 날 있었던 무이구곡 답사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참으로 즐거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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