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선생 초상화
숲 속에 가려져 있는 송시열선생 수식 배롱나무
송부자 수식 팻말
송부자 수식 배롱나무 안내판
우암이 제자를 가르치던 남간 정사(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
남간 정사 현판
연못 내 인공섬 봉래산과 왕버들
기국정
우암 송시열선생과 남간정사 배롱나무
그가 비록 많은 사람들의 존경받는 위인이라 하드라도 한평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공과 과가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도 예외일 수 없다. 조선의 유학자로는 유일하게 공·맹 반열의 송자(宋子)로 불릴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양반의 특권제한, 서북지방의 인재 등용, 과부들의 개가허용 등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것은 공(功)이고, 무모한 북벌론, 지나친 친명주의, 노론과 소론의 분당, 남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 등은 과(過)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후학들에 의한 남인의 차별은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이후 1910년 즉 조선이 망할 때까지 무려 216년 동안 남인에 대한 차별은 지속되었다.
보직이나 승진에 불이익을 받았음은 물론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한 직급 오르는 데에도 무려 23년이 걸린 사례가 있고, 뱃길이 험했던 제주목사에 남인 출신이 많은 것도 일부러 험지에 보냈다는 지적이 있다.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증폭된 것은 현종 대에 있었던 1, 2차 예송이다. 1차는 서인이, 2차는 남인이 승리해 산술적으로는 1: 1 서로 비겼다.
그러나 숙종 대, 1차 상례(喪禮)가 잘 못되었다는 남인의 유학자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우암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덕원(德源)으로 유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뒤 이어 장희빈의 아들(후일의 경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와 노론 일당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서 우암은 다시 부활했다.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송시열과 윤증 간의 시비에 대해 국왕이 윤증의 잘못으로 판정한 처분)이 내려졌고, 1744년(영조 20)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 학문적인 권위와 정치적인 정당성이 모두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한민국 건국 후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몇 분의 영남 출신 대통령이 선출되고 그에 따라 실로 200여 년 만에 각료 등 정부 고위직에 남인의 후예들이 진출했으나 그 때마다 지역편중 인사라고 비난하는 등 차별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개인 우암은 권위를 되찾았으나 남인의 후손들은 아직도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다. 이런 배타적인 비판은 국민통합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중한은 <택리지>에서 조선인재의 절반이 영남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전기 이미 기축옥사(己丑獄死)로 1,000여 명이 희생되었고 조선후기에도 차별이 지속되자 성군 정조(正祖)가 남인을 달래고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사상 최초로 한양이 아닌 도산에서 별시(別試)를 치르기도 했다. 이때 응시자가 무려 7,728명에 달했다니 이는 정계진출을 목말라했던 남인들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우암은 주자학의 대가로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 <정서분류>, <계녀서> 등 방대한 저술과 <송자대전> 등 문집을 남기고, 화양서원을 비롯한 전국의 44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대전시 동구의 잘 정비된 우암사적공원을 둘러보고 남간정사(南澗精舍,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를 찾았다. ‘남간(南澗)’은 주자의 시 ‘운곡남간’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생전에 저술과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사후에는 후학들이 <송자대전(宋子大全)> 목판을 만들던 곳이다. 그 뒤편에 송부자(宋夫子)가 심은 배롱나무 한그루가 있다.
1683년(숙종 9) 정사를 지을 그때 심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올해로 수령이 350여년이나 된다. 그러나 주변에 다른 나무들이 무성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자세가 휘는 등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암에 명성에 비해 관리가 너무 부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햇볕을 가리고 있는 주변의 나무를 잘라내고 공간을 충분히 넓혀주든지 아니면 공원 내 양지바른 곳으로 옮겼으면 한다. 또 보호수로 관리할 필요도 있다. 이 나무는 우암의 손때가 묻은 유일한 살아있는 유품(遺品)이다. 경상도 포항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도 장기 유배 중에 우암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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