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해방둥이의 변

이정웅 2006. 7. 22. 16:43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는 올 해가 진갑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61년은 우리 현대사 그 자체이다. 한국동란 때에는 영문도 모른 채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피난길에 나섰고, 마을 앞 신작로를 유엔군을 태운 군용트럭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주할 때에는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헬로’ ‘오케이’를 외치며 흑인 병사들이 던져주는 껌과 과자부스러기를 주어먹으며 유년을 보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우리 대통령’ 이라는 글을 썼고,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선생의 돌연한 죽음을 듣기도 했다. 다들 가난해 전체 졸업생의 삼분의 일도 못가는 시골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정권교체를 눈앞에서 두고 또 다시 조병옥 박사의 죽음을 맞기도 했다. 4·19혁명 때에는 고교생 선배들을 따라 지서(支署)며 면사무소를 찾아가 “물러가라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듬해 장면 정권이 무너지고 5·16군사혁명으로 세상이 또 바뀌었다.

읍내에 있는 농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덴마크를 부흥시킨 달가스의 전기와 심훈의 '상록수'를 읽으며 가난한 농촌을 부흥시켜야겠다는 꿈을 가졌고, 졸업 후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병역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기꺼이 입대했었다. 변변치 못한 방한복을 입고 보초를 서면서, 한창 유행하던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를 중얼거리며 별빛 영롱한 밤하늘을 쳐다 보며 장가를 가 아이를 낳고 그 애들이 군에 갈 나이가 되면 통일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이런 고통은 내 세대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공직에 복귀해서는 통일벼 재배며, 보리광파 재배, 퇴비증산 등 농사에 전투개념을 도입한 이른바 '영농시한작전'에 뛰어들었고 지붕개량, 마을 안길확장 등 새마을 사업으로 밤늦게까지 일했으나, 수당이 지급되는 오늘날과 달리  막걸리 한 사발로 만족했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과 유신지지 홍보활동에 참여하며 권력의 하수인(?)이 되기도 했고, 군부에 맥없이 주저앉은 최규하 정권의 무기력을 안쓰러워했으며, 서울의 봄을 맞아 큰 기대를 가졌으나, 신군부의 집권으로 그 기대가 무너졌다. 88서울올림픽 준비로 꽃길 조성 등에 힘썼으며, 헌정사상 최초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의 무능으로 IMF를 초래, 온 국민이 고통을 당했고, 김대중 정권이 출범했을 때에는 많은 공무원들이 불안해했지만 훈장을 받는 영예도 누렸다.

돌이켜 보면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의 첨병이 되어 그때그때마다 협력자(?)로 살아오다가 마침내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삶을 두고 일부 젊은 세대들은 권력의 주구노릇을 했다고 비난하지만 해방 후 새로운 교육을 받은 우리세대인들 왜 민주의식이 없으랴만 우선 가난을 면하는 것과 아이들 공부시키는 일이 급선무였을 뿐, 전쟁을 온 몸으로 체험한 우리를 두고 반통일적이며 수구 골통이라는 데는 울화가 치민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못 배운 한(恨)의 고리를 끊기 위해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자식들을 고등교육까지 시켰건만 아버지 세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남이 하는 것은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생각 때문에 사회가 분열로 빠지고 있어 안타깝기만하다.

해방둥이들의 생애는 한 편의 드라마이다. 60년 전의 벌거숭이가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난 한때를 시대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대립과 반목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한다.

해방 61년, 이제 우리 사회도 완숙해질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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