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서상돈님의 혼이 깃든 대구교구청의 히말라야시다

이정웅 2007. 5. 20. 13:31

 

 1900년 대 초 서상돈님 심은 히말라야시다(천주교 대구교구청 )

 기념식수 표석 '서당돈 수식'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직접심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구의 2007년은 매우 특별한 해이다. 100년 전인 1907년, 서상돈 등 지식인들이 전 국민이 3개월 동안 금연을 통해 절약한 돈을 모아 나라가 진 빚을 대신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고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해이고, 프랑스의 지리학자 바라(Charles Louis Varat 1842~1893)가 대구를 다녀가면서 중국의 북경성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예찬했던 대구 읍성(邑城)이 철거되었던 해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대구시민들의 자긍심을 드높인 일이라면 후자는 대구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일이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을 대구읍성을 박중양이라는 한 친일분자가 흔적도 없이 파괴시켰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정신이 발휘된 국권회복운동” “대구 사람들의 진취적 개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평을 받는 국채보상운동은 시대를 초월해 널리 선양할 일이다.

우리 대구가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신라의 신문왕이 대구로 천도(遷都)하려 했던 일과 임란 후 경상도의 행정과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감영(監營)이 설치되고 나서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역시 조선 8도 중의 1개 도(道)의 감영 소재지일 뿐이었다.

대구가 전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국채보상운동을 대구사람들이 주도하고 부터이다. 남녀의 성차별이 극심했고 반상(班常)의 차이가 엄격했던 시절 성별과 연령, 신분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민족 전체가 참가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의 자랑거리었다.

대구시에서는 이 운동을 국민정신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국채보상운동 기념 공원을 조성하고 100주년을 맞는 올해 주창자인 서상돈과 김광제 두 분을 ‘이달의 문화인물’선정하도록 하고 ‘기념우표발간’ ‘국제학술대회의 개최’ ‘흉상건립’ ‘기념음악회개최’ ‘금연운동전개’ ‘관련유적답사’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그러나 100년 전 연일 대서특필로 이 운동을 보도했던 그 때와 달리 올 해의 중앙 일간지는 단 몇 줄의 기사로 취급해 국민들의 외면(?) 속에 지역민만의 잔치(?)로 만 끝나 몹시 아쉬웠다. 더 나아가 “국채보상운동”의 산실(産室)이라고 할 수 있는 광문사(廣文社) 사옥이 헐려 아쉬움이 더 컸다. 사라진 문화유산이 어디 대구광문사뿐이랴 만 100주년 기념행사를 불과 코앞에 두고 그 것도 기념관을 새로 짓겠다는 등 후속 계획을 마련하고 있으면서도 있는 것도 보존하지 못한 것은 시민의 수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또한 사실상 주역이었던 서상돈(1851~1913)의 생가는 재건축을 위해 헐어버린 상태에서 1세기를 맞았다.

대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모인 ‘달구벌 얼 찾기’에서는 올해 사업으로 장차 지역사회에 주인공이 될 청소년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 관련 유적지 즉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광문사 옛터-시민회관 광장-서상돈님의 생가-서상돈님의 묘소를 둘러보며 운동의 이의와 후손인 우리들이 가져야할 자세 등을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한정되어 범물동 묘소는 갈 수 없었고, 생가는 철거 후 복원이 안 되어 대신 달성공원에 새로 단장한 ‘향토역사관’을 관람하기로 했다.

시행 첫 날 (국채보상운동을 발표했던 2월 21일) 우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주목으로 기념식수를 했다. 지역과 연고가 있거나 지역을 빛낸 인물을 기리고 시민들이 나무를 사랑하도록 하기위해 최제우나무나 이인성나무등을 지정한 경험이 있는 필자는 솔직히 기념공원 내에 있는 적당한 나무를 골라 ‘서상돈 나무’로 명명(命名)하여 그분을 기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공원인데도 회(會) 이름으로 나무를 심는 것조차 공원관리청과 대구시에 승낙 받아야 하는 복잡한 절차를 볼 때 있는 나무를 그대로 활용한다면 절차가 더 까다로 울 것 같아 포기하고 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행사가 끝난 한참 지난 후 대구의 골목문화를 새롭게 조명한 책 <대구신택리지>를 발간해 시민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거리문화시민연대’의 권상구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책 발간 후 늘어난 시민들의 골목문화에 대한 관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답사를 실시하는데 하루쯤 협조해 주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그날 답사는 골목보다 도심지에 있는 노거수가 중심이었다. 계산성당 내에 있는 이인성나무 등 몇 나무를 보고 마지막은 천주교 대구교구청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권 국장이 말하기를 교구청 앞에 서상돈님이 직접 심은 나무가 있으니 함께 보자고 했다. 100주년기념행사를 진행하면서 묘소와 생가(生家)를 보여주지 못해 아쉬움이 컸었는데 좋은 사료를 지척에 두고도 몰라서 못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그날은 금남(禁男)의 구역인 수녀원도 개방되는 날이어서 이를 보기 위한 신도들로 엄숙한 경내가 인파로 붐볐다. 대구가톨릭의 심장부인 교구청사 입구 계단 양 쪽에 크기와 굵기가 비슷한 히말라야시다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밑에는 서상돈 수식(手植)이라고 쓴 표석이 있어 그 분이 심은 기념식수임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권 국장이 교구청사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니 적어도 1910년대에 조경수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구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애국자이자,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내 놓은 사회사업가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로,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대구민의소를 설립한 경제인으로, 계산성당을 짓는 데 거금을 지원하고 교구청 일대 일만여 평의 땅을 희사한 신앙인으로 한 시대를 참으로 다양하게 살다 간 그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것은 이제 이 나무뿐이라는 생각을 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다만 나무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수관부를 보기 싫게 잘라 그 분의 숭고한 정신에 걸맞지 아니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시공을 초월해 존경받을 대구를 대표할 님의 채취가 서려있는 이 나무가 그의 나라사랑 정신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고 잘 가꾸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