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어우러져 피는 궁남지 연꽃
궁남지 홍연 선화공주와 무왕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 아니가 한다
희귀한 백연 밭
무왕의 탄생설화가 있는 궁남지
여름 더위가 극성인 7월 5일,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재위기간 600~641)이 한껏 멋을 부려 조성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 부여 궁남지를 찾았다. 수십만 송이의 홍·황·백색의 연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할아버지 혜왕이나 아버지 법왕과 달리 왕권을 강화해 내치를 개혁하고, 대외적으로는 이웃 신라를 침공하는 등 백제중흥을 노렸던 무왕은 그의 부인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라는 전설이 있다.
“사비시대 왕궁 남쪽 못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交通)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30대왕인 무왕 장(璋)이다.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이 궁핍하였음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서동(薯童)이었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老臣)이 찾아 와 왕의 밀명(密命)을 전하였는데 신라의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기꺼이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 탐지활동을 충실히 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자자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임임을 알았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지어 퍼트리기로 다짐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 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나갔다. 결국 대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 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
위의 내용은 궁남지 못가 안내판에 쓰여 있는 것으로 부여지방에 전해오는 전설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기이(奇異) 편 무왕 조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무왕의 어머니가 살든 곳이다. 전설에는 ‘궁남지’라고 못을 박았으나 삼국유사에는 ‘남쪽 못’이라고 하여 특정 못을 지칭하지 아니하였다. 이 내용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궁남지는 무왕이 즉위한지 35년이 되는 즉 634년에 축조한 못이기 때문이다.
둘째, 서동이 서라벌에 간 동기를 전설에서는 ‘신라의 정세를 정탐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삼국유사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머리를 깎고 들어갔다고 했다. 즉 미모가 아름다운 여인을 취하기 위해 간 것으로 되어있다.
셋째, 전설에는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가 우연히 만나 사이가 좋아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는 도중에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정을 통하고 그 때까지 서동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있으나 전설에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첫째 선화공주가 어머니로부터 순금 한 말을 가지고 백제로 간사실과 둘째 서동이 무왕이 되고 선화공주가 왕비가 되어 사자사로 가는 도중에 못 속에서 나온 미륵삼존을 만나 경의를 표하고 무왕에게 부탁하여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은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사항은 삼국유사 역시 당시 떠도는 이야기를 종합한 책인 만큼 부여지방에서 전해오는 전설과 삼국유사 다르다고 해도 어느 것이 옳다고 섣불리 단정 할 수 없다. 더구나 천년도 더 지난 이야기인 만큼 참고할 따름이다.
훌륭한 임금 무왕을 내조한 선화공주가 신라 사람이니 그 후예로서 궁남지를 찾는 기분이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 8: 30분 대구를 출발했다. 사진작가이자 대경습지보전연대 회장을 역임한 이상원님의 호의였다. 평일이라 예상했던 시간보다 30분 앞서 주차장에 닿았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흔히 보던 붉은 연꽃뿐만 아니라 노란연이며 흰연이 장관을 이루고 또 어떤 곳에는 환경부지정 멸종위기 2급식물인 가시연꽃과 왜개연꽃도 있었다. 넓은 연밭을 거니는 동안 연 향기에 취할 것만 같았다. 무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었다는 궁남지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특히 중국의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 따서 만들었다는 가산(假山) 대신 포룡정(抱龍亭)이란 정자가 못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어 실망스러웠다.
우리나라 연근 생산의 60~70%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의 시민으로서 부여군이 해놓았으면 얼마나 잘 해 놓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으나 생각과 달리 잘 꾸며 놓았다.
다만 주변의 잘 조성된 연 밭과 달리 정작 궁남지 안에는 한 포기의 연꽃도 없고, 못 둑의 수양버들이 노화(老化)된 데에도 대를 이를 후계목을 키우지 아니하여 수명이 짧은 이 나무들이 언제까지 버틸지 걱정스럽다. 또한 수생식물을 보강한답시고 상당한 면적에 부들을 심은 점도 아쉬웠다. 그러나 인력과 재정이 그리 넉넉지 못한 작은 기초자치단체인 부여군이 이런 아이디어를 내고 이만한 정도의 연 밭을 만들어 국내 유명 관광지로 개발한데 대하여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부여국랍박물관을 돌아보았다. 부소산을 올라 낙화암과 고란사를 보려다가 일정이 맞지 아니하여 취소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