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미륵세계의 출현을 기다리는 경남 사천의 매향비

이정웅 2007. 12. 11. 17:30
 

 1387년(우왕 13) 내세에 미륵불이 출현하여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세운 매향비 

 매향비 주변

 여느 매향비와 달리 15행 202자 중에서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가장 많다는 사천매향비 (보물제614호)


나무로 집을 짓고, 배와 가구, 생약의 원료, 땔감과 종이를 만드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지만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권력이 있거나 없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미륵(彌勒)세상 즉 이상세계의 출현을 기다리며 향(香)을 묻고 증표로 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으니 매우 흥미로웠다.

초겨울 남녘땅 경남 사천시 삼천포읍으로 향했다. 겨울 바다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약간 들떠있었다. 추위에 약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호수와 같은 남해바다가 마음에 평화를 주며 싱그러운 난대활엽수가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사장과 함께 난대식물을 재배해 조경수로 보급하고 있는 전(全)사장을 만나 후박이며, 아왜, 목서, 태산목 등을 키우는 농장을 견학하고 매향비가 있다는 곤양면으로 향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건너야했다. 매향 풍습은 드물게는 강원도 고성 그 외에는 주로 서, 남해안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사천 매향비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몇 자를 제외하고는 원문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고 한다. 그러나 보물(제614호)지정된 매향비(埋香碑)를 찾는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혹은 지나친 길을 되돌아오고 혹은 물으면서 곤양면 홍사리에 닿았다. 예상과 달리 인가와 떨어진 외진 산 밑이었다. 자료를 미리 챙기지 아니하였다면 이곳도 그냥 지나치리만큼 시당국의 정보제공이 부족했다.

향을 묻고 비를 세운 해가 1387(우왕 13)년이라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620년 전이다. 당시 고려는 이미 기우러져 가고 있었고 우왕(禑王,재위기간 1374,9~1788,6 13년 9개월)은 신돈의 아들(?)이라는 핸디캡이 때문에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왜적이 자주 출몰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기 때문에 서민들의 삶도 힘들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요동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명나라와는 전쟁도 불사할 만큼 강경책(强硬策)을 펼쳐 이른 바 요동정벌의 계획을 세워 일전을 불사했다. 그러나 야심가 이성계는 이 거사를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아 오히려 말머리를 돌렸다. 첫째, 소국이 대국을 거스를 수 없다. 둘째, 여름에는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거국적으로 원정하면 왜구가 틈을 타서 공격해 올 것이다. 넷째, 지금은 덥고 비 오는 시기이니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대군이 질병에 걸릴 것이다. 라는 4대불가론을 펼치며 왕명을 거역한 사건이  ‘위화도회군’이다. 이렇게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삶이 고달플 때 일어나는 현상은 민중봉기가 아니면 현실도피이다. 매향비(埋香碑)는 현실 도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자연석에 15행 202자를 새긴 비의 제목은 ‘천인결계원왕문(千人結契埋香願王文)으로 승려 4,100명이 모여 침향목(沈香木)을 묻어서  미륵불이 나타나기를 기도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4,100명이 향계(香契)를 조직하여 내세의 행운을 바라고 왕의 만수무강과 백성이 평안을 기원한다는 내용으로 달공(達空)이 비문을 짓고 수안(手安)이 썼으며 김용(金用)이 새겼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도 지극 정성으로 빌면 하늘이 감동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한 두 사람도 아닌 4,100여 명의 백성들이 바다와 강이 만나는 특별히 정한 곳을 골라 향을 묻고 간절히 발원하였으니 하늘도 무심치 아니하여 그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5백년 왕업을 잇던 고려는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섰으며 21세기에도 국토는 분단되고, 빈부격차는 나아진 것이 없으니 언제 그 미륵세계가 도래하려는 지 자못 궁금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먹거리가 부족했던 지난날과 달리 쌀이 남아돌고, 옷이 닳아서 라기 보다 지겨워서 못 입는 풍요가 넘치는 현실을 보면 지금 이렇게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사천까지의 먼 길을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이용해 편안히 가고 오는 현실이 어쩌면 향을 묻으면서 고대했던 이상세계가 도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미륵세계의 출현을 염원하며 묻은 나무가 그 많은 나무 중에 왜 향나무였어야 했는지가 궁금하다. 처음에는 사체(死體)의 냄새를 막기 위해 쓰다가 제사에 사용되었다는 향은 저승의 혼령을 이승에 불러내는 역할도 한다니 현세와 내세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 향나무를 사용했을 것은 아닐까. 향나무가 이적(異蹟)을 일으키는 영물로 취급 받은 사례는 매향풍습이전에도 있었다. 일연 스님의 저서 <삼국유사> 포산이성(包山二聖) 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태평흥국(송나라 태종의 연호) 7년 임오(982) 즉 우리로서는 고려 성종 원년 성범이라는 중이 있어 처음으로 이 절에 머물면서 만일미타도량(불교의식의 하나로 아미타불이 주관하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며 만일동안 아미타불을 외우는 것) 열어 50여 년 동안 부지런히 노력하니 여러 번 특이한 상서가 있었다. 이 때 현풍(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남자 신도 20여명이 해마다 모임을 만들어 향나무를 채취하여 절에 바쳤다. 매번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고 물에 씻어서 발 위에 펼쳐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했다. 이로 인해 고을 사람들은 향을 크게 시주한 무리들에게 시주하고 빛을 얻는 해라고 축하하였으니 이는 두 성인의 영감이요 혹은 산신의 도움이라 한다. 산신의 정성 천왕인데 일찍이 가섭불 시대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아 발원 명세를 하고 산중에서 1천명의 수도자가 출현하기를 기다려 남은 과보를 받게 된 것이라 하였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비슬산의 옛 이름이 소슬산(所瑟山)이고 범어(梵語)로는 포산(包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절에 향나무를 바치는 신도들 모임인 향계(香契)가 정치적으로 혼란하거나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던 여말(麗末)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이미 시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향나무를 묻은 장소가 하필이면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이어야 했는지는 알 수없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