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인 김정과 경북 봉화의 제주송
제주목사 김정이 임지에서 씨를 보내 심은 제주 소나무가 있던 자리, 본래 숲은 한국동란 시 베어지고 현존하는 것은 그후에 다시 심은 적송이나 주민들은 아직도 제주송이라 부른다.
노봉 김정이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을 연마하던 노봉정사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를 영인한 것이라 한다.
노봉 선생이 영주에서 이 곳에 터를 잡은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비
지난 1월 나는 한 장의 초청장을 받았다. 대구향토문화연구소와 경북대학교 울릉도·독도연구소가 공동주체하고 경상북도와 문화재청이 후원하는 “경상북도 마을 숲의 현황, 보전, 복원 및 활용”에 관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데 토론자로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30여 년을 나무와 더불어 살았었고, 지금도 모 단체가 주관하는 생태공원조성에 종사하고 있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손놓은 지가 몇 년 되어 혹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여 불참하면 안 되겠느냐고 전화를 했더니 이름이 이미 인쇄되어 어쩔 도리가 없을 뿐 아니라, 역할이 문화재청의 모 사무관이 발표하는 “마을 숲 문화재의 관련법규와 향후개선방안”에 대한 의견만 개진하면 되는 일인 만큼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해 참석했다. 어쩌면 오히려 잘된 일 같았다. 옛 사람의 수식목(樹植木)을 찾아다니면서 만났던 많은 나무들 중에는 천연기념물과 그렇지 않는 나무도 있었지만 하나 같이 서둘러 보호하지 않으면 곧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어 기회가 되면 문화재청에 건의할여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담당자를 직접만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오히려 바라든 자리였다.
주체 측에서 제출한 유인물 중 석대권 교수가 쓴 “민속 문화자원으로서 마을 숲의 활용방안”이라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상도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봉화군 물야면 오록1리 창말(창고가 있던 마을)에 제주목사를 지낸 이 마을 출신 노봉 김정이 제주 솔 씨를 가져와 심은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한국동란 시 마을에 숨어든 인민군을 감시하기 위해 다 베어버리고 그 후 노봉의 후손들이 심은 아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신기로울 것도 못되겠지만 300여 년 전 항해술이나 선박건조기술이 오늘 날처럼 발달하지 못한 그때 이루어진 일이자 바닷바람만 먹고 자란 나무가 소금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봉화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제주목사 노봉 찾는 일에 나섰다. 현재 관직으로는 도지사 즉 차관 급 이상에 이르는 높은 벼슬을 지냈지만 아쉽게도 인터넷을 검색해서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한 향토사학자가 정리한 “영남인물지”에서 그의 간단한 이력과 본관 등을 알 수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풍산종친회를 통해 보다 자세한 자료를 입수 할 수 있었다.
호는 노봉 1670년(현종 11) 영주에서 휘봉(輝鳳)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696년(숙종 22)에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영주에서 봉화로 이주하였다. 1708년(숙종34)에 마침내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함경도 도사를 지낸 후 낙향하여 10여 년을 학문연구에 몰두하다가 1722(경종 2) 다시 출사해 병조정랑, 세자시강원 사서, 옥천군수를 거쳐 강릉도호부사를 역임했다.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에 흉년이 들자 봉급으로 백성을 돕고, 허물어진 충·효·열사의 정려각을 보수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등 선정을 베풀자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일로 공사(公私) 어디를 가더라도 역에 제출하면 말 한 필을 제공받는 숙마일필(熟馬一匹)를 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1728년(영조 4)에 일어 난 이이좌난을 평정한 공으로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 일등이 되었다. 그 후 이 공훈이 허위라 하여 파직되고 의금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는 일도 있었으나 동료 권상일 등이 상소하여 풀려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벼슬은 멈추지 아니하고 1735년(영조 11) 64세라는 적지 않는 나이에 제주목사 겸 호남방어사로 제수 받았다. 이 직책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공직이라는 것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그는 제주 발전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했다. 서당을 건립하여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는 한편, 사비를 보탰을 뿐 아니라, 때로는 본인이 강학을 주도하여 도민의 향학열을 불태웠고, 포구개발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넓이 10보, 길이 120보, 높이가 6보이자 선박출입을 감시할 영송정(迎送亭)을 포함하여 완성한 화북포(禾北蒲)는 우리나라 최초의 축항공사로 기록될 정도였다. 1737년(영조 13)3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기 위해 포구에 대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혹자는 화북포를 건설 때 지나치게 과로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을 뿐 아니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 임금마저 삼도감사에게 명해 제주도에서 경상도 봉화까지 운상하도록 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학문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만들어진 섬사람들이 만든 흥학비(興學碑)와 화북포건설 등 공직자로서 본분을 다했음을 기리는 봉공비(奉公碑)가 지금도 제주도에 남아 있으며 선생이 오록리에 터를 잡은 것을 기리는 300주년 기념행사에 제주도 부지사가 참석해 축하를 하고 갔다고 한다.
위패는 봉화의 오천서원과 제주시 이도1동 영혜사(永惠祠)에 모셔져 있으며 저서로 <노봉집>이 있다.
그가 씨를 보내와(40여 개라는 설도 있다)오록리에 심었다는 제주산 소나무 숲은 현재 없다. 나는 한 때 산림 공무원으로 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함께 봉화를 방문했다. 머리 속에는 아무리 다 베어버렸다고 하더라도 한 그루 쯤은 남아 있을 것 아닌가 하여 기대감으로 흔적 찾기에 골몰했으나 물거품으로 끝났다.
애석하기는 후손들이 오히려 더해 제주에서 가져온 해송 대신 적송(赤松)을 심어 지금도 그 소나무 숲을 “제주송”이라 부르며 조선(祖先)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한 목민관이 임지를 너무나 사랑해 그 곳에 자라는 나무의 씨앗을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 심고 그 것이 근래까지 전해와 아름다운 이야기로 회자(膾炙)된다는 것은 이 삭막한 세상에 얼마나 즐거운 미담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