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몽마르트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노래비
담쟁이덩굴 즉 청라로 덮힌 선교사 챔니스 주택
2009, 6, 17일 세운 동무생각 노래비
파리의 몽마르트를 오르는 길과 흡사한 계단 길 1900년 대 초 거의 대다수 계성학교학생들은 이 길을 통해 등하교했다.
동산언덕에 새로지은 제일교회, 몽마르트언덕에 사크레쾨르사원이 있다면 대구의 몽마르트 청라언덕에는 제일교회가 있다.
동무 생각 노래비를 세우기 위해 2008 년 11월 14일 행복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좌측으로 부터 이명수 동산의료원 홍보실장, 고 이혁우 교수, 필자 김덕영 중구문화원장
이 노래가 지금도 음악교과서에도 실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60대 초반인 우리 또래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자주 불렀던 노래이다. 특히 청소년적십자단체에서 같이 활동했든 이웃 여학교 J양이 모임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라 그녀의 청순한 모습과 함께 내 가슴 속에 오래 동안 남아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노래가 대구 출신 박태준이 작곡하고, 마산출신의 시조 시인 노산 이은상이 가사를 썼다는 사실과 노래가 탄생한 무대가 대구의 동산(東山) 언덕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최근에 알았다.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는 나로서는 반갑기도 했지만 너무 늦은 이해에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대구의 자랑거리가 큰 산에 묻혀있는 광맥(鑛脈)처럼 끝이 없다는 생각도 했다.
1988년은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였다. 그 해 봄 나는 서울의 한 복판에서 사무관 승진시험을 보기 위해 잠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장래가 걸려 있는 일이라 다른 동료들은 일찍이 상경하여 이른 바 족집게 강사들이 있는 고시학원에 다녔으나 기술직인 나는 개설된 과목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설령 있다 하드라도 책을 여러 번 정독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하숙집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것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청에 근무하며 함께 하숙하는 고교동기인 문상오군과 그의 동료인 박재종님과 함께 인사동 부근의 막걸리 집을 찾았다.
평소에 나누는 말도 싸움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경상도 사람들인데 한 순배 술잔이 돌자 목소리가 더 커졌던 모양이다. 안주며 술을 나르며 시중을 드는 아주머니가 우리 자리에 오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대구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 곳 출신으로 서예가 죽농 선생이 훌륭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얼버무렸지만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장래 대구시의 간부공부원이 되어 시민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이 막걸리 집 주모보다 지역 출신 예술가를 몰랐던 무지에 대한 충격이 온몸에 번져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합격해 시정에 정열을 쏟고 지금은 은퇴했지만 그 때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대구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썼지만 그 때 받은 상처는 항상 내 마음 속이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 남구문화원이 기관지 ‘문화산책’을 보내왔다. 원하지도 않는 곳에서 보내는 자료들이 많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릴 때가 많은데, 이 책은 잘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재녕 원장이 워낙 열심히 문화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라 제목만이라도 읽어보기 위해 책을 펼쳤더니 가곡교실 강사 이혁우님의 ‘우리가곡 동무생각’이라는 글이 시선을 끌었다.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대구제일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다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1~1923년 마산창신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이때 시조 시인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이 계성학교에 다닐 때 집 부근에 있던 신명학교에 재학 중인 한 소녀를 사모했으나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말한 마디 건네지 못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노산이 써 준 가사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로 시작되는 <동무생각>이며, 청라언덕은 박태준이 태어난 동네에 있는 푸른 담쟁이덩굴 즉 ‘청라(靑蘿)가 올려 진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던 동산을, 백합(百合)꽃은 그 소녀의 얼굴이 백합꽃처럼 흰데서 부쳐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지식이라는 것이 베스트셀러나, 훌륭한 교수의 강의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데서부터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곡 동무생각 역시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들은 바 있고 노래 말 속의 그 소녀가 경북여고 학생이었다고 알았는데 이처럼 구체적으로 동산의 언덕이 <동무생각>의 청라언덕이며 그 소녀가 신명학교라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이곳을 대구의 몽마르트로 만들고자 했던 나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였다. 현직에 있을 때 파리의 몽마르트를 보고 온 나는 귀국 보고회에서 두 곳을 후보지로 추천했었다.
한 곳은 지금의 제일중학교 일대로,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일 뿐 아니라, 선조들이 일부러 돌거북을 만들어 묻어 대구를 화마로부터 안전한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곳이자 대구 십경의 한 곳이어서 역사성도 있으며, 쇠퇴해 가는 봉산문화거리와 연접된 곳이고, 두 번째는 동산일대였다. 이곳 역시 언덕일 뿐 아니라, 넓고 아름다운 녹지가 있고, 문화재로 지정된 3채의 선교사 사택자체도 역사적인 건물인데, 각기 선교, 의료, 교육·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어 대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사료들을 만날 수 있으며, 3, 1운동 길로 명명된 계단 길은 파리의 몽마르트를 오르는 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겉과 같아 분위기를 연상시키고 또한 계성학교를 다녔던 박태준의 형제를 비롯해 현제명, 김동리, 박목월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모두 이 길을 통해 등, 하교를 해 그분들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 그분들의 꿈과 예술적인 영감은 어쩌면 이 언덕의 한 모퉁이거나 나무 밑, 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이 길에서 영글어 같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상화, 이인성 또한 이 언덕에 올라 작품을 구상했던 곳으로 예술적인 분위기가 이처럼 응축된 공간은 대구의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내 생각을 불로그에 올렸더니 이혁우교수가 동감한다며 김덕영 중구 문화원장과 협의 중이라는 낭보를 전해왔다. 2008년 11월 14일 행복식당에서 김원장과 이 교수, 이명수 동산의료원 홍보실장, 나 이렇게 넷이 만나서 대강을 논의하고 그 후 경대 김용수 교수, 서예가 추진호님까지 합세해 영천에서 돌을 구해 2009, 6, 17 '동무생각' 노래비를 세웠다. 오늘날 일대가 청라언덕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이런 연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