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시민운동가는 왕인가?

이정웅 2008. 9. 30. 16:37

[아침논단] 시민운동가의 '이슬론'과 '소금론'
소금이 짠 것은 부패 막기 위함인데 소금이 싱거워지면 무엇에 쓰나
시민운동가가 도덕성을 잃으면 짠맛 잃어버린 소금과 뭐가 다른가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가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추락했던 것처럼 요즈음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한국 시민운동가들의 행태가 따가운 여론의 눈총을 받고 있다. 보조금 횡령혐의로 검찰로부터 수사를 받게 된 한 환경운동가는 "시민운동가는 이슬을 먹고 살아야 한다지만 운동가도 최소한의 문화를 누리며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눈물까지 보였다. 그런가 하면 포스코가 만든 공익재단인 청암재단이 지난 3년간 30명의 시민단체운동가에게 일인당 3만 달러씩 해외연수비용을 제공했으며, 그 대상이 좌파 진보성향 단체에 집중되었다는 주장이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의해 제기됐다.

도덕성이란 화려한 꽃이나 늠름한 나무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냄새까지 맡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꽃향기와 비슷하다. 도덕성이 충만하면 굳이 홍보하지 않더라도 향기로운 꽃냄새가 나지만 부도덕함이 배어 있다면 아무리 겹겹이 포장을 해도 악취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공직자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벌떼가 벌침을 쏘듯 경고음을 발해왔다. 공직자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가는 공복(公僕)이기 때문에 청문회나 재산공개 때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비하면 시민운동가들에게 도덕적 감시망은 느슨하다. 아니 느슨하기보다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한 보수나 대우는커녕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삶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공익', 즉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의심쩍은 행태와 도덕적 흠결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부 시민운동가들의 언행은 유감이다. 시민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법에 의해 저울질당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너마저'라는 씁쓸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시민운동가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다. 소금이란 썩는 것을 방지하는 데 특별한 역할이 있다. 그 소금이 싱거워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바이블에 나오는 평범한 말이지만, 우리 시민운동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할 만큼 소중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가의 주요 임무는 정부와 권력을 감시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시민단체를 감시하는 데는 없다. 감시하기는커녕 잘 보이려고 너 나 할 것 없이 난리다. 기업은 기업들대로 시민단체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이다. 또 정부정책이나 인사는 시민단체의 지지 없이는 '도덕적 정당성'은 물론 '정치적 정당성'도 획득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럴 정도로 시민단체는 기업과 국정의 올바름을 가늠하는 '철인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민주사회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특권이긴 하나, 시민운동가들의 도덕성 때문에 정당화되어 왔다. 그런데 정작 그 도덕성이 문제가 되다니,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남의 눈의 티끌을 보는 데만 열중했단 말인가. 지금 시민운동가들에게 필요한 성찰거리는 이슬을 먹고 살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사회의 소금에 해당될 만큼 고결한 삶을 살았느냐의 문제다.

'고결함'은 영어로 'integrity'인데 로마의 'integritas'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로마의 지휘관들은 아침마다 군인들과 점호를 취할 때 자신들의 가슴을 두드리며 'integritas'를 외치게 했다. 이 말은 "이 갑옷으로 충분히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라는 뜻이다. 모름지기 한국의 시민운동가들은 로마의 군인이 될 필요는 없으나, 아침과 저녁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이런 마음으로 사회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입력 : 2008.09.28 22:57 / 수정 : 2008.09.28 2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