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정만양·규양의 형제애를 상징하는 횡계서당 향나무

이정웅 2009. 3. 9. 17:34

 

 

 

 

 정만양, 정규양 형제분이 어느 스님으로부터 얻어 심었다는 모고헌 내 향나무(위)  대전리 종택의 향나무(아래) 

 훈`지 양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며 산수를 즐겼다는 모고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 냇가에 제비집처럼 붙어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 옥간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 횡계구곡의 제4곡이다.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에는 형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1664~1730)과 아우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1667~1732)이 은거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든 공간이 있다.

우애가 좋기로 중국의 성리학자 정호·정이 형제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학문애서도 그들에 버금가는 분들이다. 아우가 지수가 지은 <훈지악보(塤篪樂譜>는 형의 아호의 머리글자 훈(塤)자와 당신의 아호 지(篪)자에서 따온 제목이기도 하지만 각기 ‘훈’이라는 악기와 ‘지’라는 악기의 이름으로 함께 불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형제간에 호흡을 맞춰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려는 의지를 나타낸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라고도 한다.

형 훈수는 안동 천전리 외가에서 아우 지수는 영천읍 대전리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내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이 곳 횡계리를 사랑한 아우 지수가 먼저 들어와 1701년(숙종 27) 와룡암 위에 육유재와 150미터 정도 아래 태고와(太古窩)를 지어 자연을 즐기며 후학을 양성했다. 5년 후 형 훈수가 그의 가족을 이끌고 합류하니 형제가 함께 이 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하게 된다. 1716년(숙종 42)에는 옥간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을, 1730년(영조 6)에는 그의 문인들이 태고와를 고쳐지으며 모고헌(慕古軒,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으로 당호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모고헌 뒤뜰에는 그들의 변하지 않는 형제애처럼 큰 향나무가 한 그루가 자란다. 정각사의 스님이 준 두 그루 중 이 곳에 심은 한 그루라고 한다.


‘시도사누승어연(時到寺樓僧語軟)’ ‘때로 절의 누대에 이르니 승려 말이 부드럽고’

‘매경다완병구의(每傾茶碗病軀宜)’ ‘매번 차 주발 기울이니 병든 몸에 마땅하네.’····


라는 시구절로 보아 한가한 틈을 타 가까운 절을 찾아 가끔 담소했던 어느 스님이었던 것 같다. 또 다른 한 그루는 대전마을에 심었다.

그들은 이 곳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스스로 닮고자 했던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㶊, 1033~1107)의 스승인 송(宋)나라 성리학자 장횡거(張橫渠 ,1020~1077)와 이름이 비슷해 더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은 횡계천 일원을 주자의 무이구곡처럼 가꾸고자 했다. 따라서 9곳에 걸 맞는 이름을 부처 노래했다.


제1곡은 쌍계(雙溪), 제2곡은 공암(孔巖), 제3곡은 태고와(太古窩), 제4곡은 옥전정(玉澗亭), 제5곡은 와룡암(臥龍巖), 제6곡은 벽만(碧灣), 제7곡은 신제(新堤), 제8곡은 채약동(採藥洞), 제9곡은 고암(高菴)이다. 이 중에서 몇 곳은 현재 ‘벽만’ 등은 그 위치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경북의 구곡문화, 2008, 경상북도· 경북대학교퇴계연구소)

   

영천은 이성계의 혁명을 반대하다가 선죽교에서 철퇴에 맞아 죽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고향이다. 따리서 후손들은 물론 후손이 아닌 사람들도 그를 사표로 삼아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고장이다. 포은의 방손이자 임란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5세손인 훈·지 형제 또한 이런 분위기에 젖어있었을 것이다. 형제는 일찍부터 종조부이자 교육자인 학암 정시연(鄭時衍 1632~1687)과 갈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당시 영남지방은 퇴계학의 바다라고 할 만큼 많은 선비들이 퇴계학에 몰두하였으나 형제는 달랐다. 이름 난 학자가 누구든 당파가 무엇이든 찾아가 배우고 토론하여 폭 넓게 공부를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증(尹拯, 1629~1714)과 정제두(鄭薺斗, 1649~1736), 정시한(丁時翰, 1625~1707), 경주에서 이 곳에 정착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 등이다. 이들은 당대 쟁쟁한 학자들이기는 하나 남인들로서는 접촉을 기피하는 인물들이었다.

특히, 서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쓴 책을 보내 잘 못된 것은 바로잡고 틀린 곳은 고쳐달라고 부탁한 윤증은 소론의 거두이다. 이런 점을 볼 때 훈·지형제의 학문을 향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노론(老論)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어 진출이 어려운 점도 있었겠지만 일부 남인들이 연줄을 찾아 소위 출세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두 분은 오로지 학문에 매달리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극적으로 은둔해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난(李麟佐亂)과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주장한 개혁론에서 잘 나타난다.

이인좌가 난은 일으킨 이유는 소외 받은 남인을 대표해 노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 이탄(李坦)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정변이다. 따라서 그동안 소외 되었던 많은 남인들이 가담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난을 찬성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난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격문을 여러 고을에 보내 의병을 모았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지수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난이 조기에 평정되어 출전을 하지 아니하였지만 그들 형제가 보여준 국가관이 매우 건전하였음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었다. 영남 사림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피폐한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농지 소유를 제한하는 토지개혁을 주장했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관료들은 지위의 고하에 따라 면적을 달리 소유해야 하고, 벼슬하지 않는 선비도 최소한 품위유지에 필요한 토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남자는 공역(公役)을 담당함으로 여자보다 많이 가질 수 있으며, 성균관, 향교, 서원 등도 주(州), 부(府)나 군현(郡縣) 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등이다. 이 개혁안은 그 후 나온 성호 이익 등 실학자들이 제안한 안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이런 면을 볼 때 훈·지는 산 속에 묻혀 글만 읽는 문약한 선비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갈암(葛庵) 사후 그의 학맥을 ‘북의 밀암(密庵) 이재, 남의 훈수’로 양분하여 영남사림을 영도했다고 한다.

<곤지록> <이기집설> <의례통고> <상지록> <심경질의보유> <계몽해의> <경학연원록>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조현명, 정간, 정중기, 안경설, 조석룡, 권응규 등 172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훈·지 사후 300여 년 형제가 알뜰살뜰 보살폈던 두 그루 향나무는 군데군데 인공수피로 때운 흔적이 있으나, 아직도 푸름을 유지하여 두 분의 고매한 형제애를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