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사키 린따로와 수성못 왕버들
수성못 축조과정을 지켜 본 왕버들
미즈사키 린따로 묘소
수성못과 법이산
한 때 대구 최고급 호텔이었던 호텔 수성
이상화 시비
주요시설을 지하에 묻고 그 위에 조성한 지산하수처리장 녹지
멀리 보이는 산이 범물동 용지봉
수성못이 새롭게 변했다. 신천의 물을 더 많이 유입시켜 맑은 물이 유지되도록 했고, 데크를 만들어 가까운 곳에서 물을 볼 수 있도록 했으며, 독특한 수변무대를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조경 식물을 심어 경관을 향상시켰다.
또한 주변에는 맛있는 음식점이 즐비하고, 한 때 요인들의 단골 숙소였던 수성호텔도 새로 꾸미고, 야간조명이 뛰어난 최첨단 음악분수도 설치해 다양한 볼거리도 갖추었다.
상화(尙火) 시비가 있는 곳은 하수처리시설을 지하에 묻고 그 위에 녹지를 조성한 환경시설의 관리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넓은 수성들은 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 의 탄생한 무대이기도 하다.
이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수성못을 보고 기뻐할 외국인이 한 사람 있으니 일본 기후현 출신의 미즈사키 린따로(水岐林太郞)이다.
그는 일본에서 촌장(우리나라의 면장에 해당)을 지냈고, 마을토지정리사업과 사범학교, 농림학교를 유치하였으며 중의원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하기도 한 열혈남아였다. 1915년 개척농민의 일원으로 황금동에 정착했다. 그가 대구로 오게 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대구농림학교 교장이었던 친구 키슈지 와의 인연 때문이 아닌 가 한다.
수성들에도 약 2정보의 농토를 마련했다. 그러나 1918년 신천 상류에 가창정수장이 들어서자 신천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기에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1924년 상수도확장공사가 시작되자 저수지 축조가 더 절실했다. 그러나 못을 만드는 일은 많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는 370정보에 해당하는 몽리민(蒙利民) 436명을 규합하여 수리조합을 설립(조합장 진희채, 부조합장 미즈사키 린따로)해 도청과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담판 끝에 이 일을 해냈다. 1924년 공사를 착수 1927년 3년 만에 완성했다.
이 후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1939년 그는 죽음을 앞두고 ‘수성못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으며 한국식으로 무덤을 만들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타계했다.
살아서는 수성못 조성에 열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못 지킴이가 되고 싶어 했다. 일제(日帝)의 미곡증산시책의 일환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으나 몽리민 중 414명 95%가 우리나라농민이고 , 일본인은 21명 5%에 불과하며, 수리면적 370정보 중 일본인 소유 토지가 40정보 약 11%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일본인의 이익을 앞세웠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못의 동쪽 큰 왕버들은 수성못의 축조과정부터 최근 새로 꾸미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다. ‘미즈사키 린따로 나무’라고 이름을 붙여 그를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또 한 분 잊을 수 없는 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는 대구에 오면 주로 수성호텔 202호실을 숙소로 이용했다. 이곳에서 도지사와 대구시장을 불러 대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시가지보다 동부 쪽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수성들이 택지로 개발되고 동대구로가 개설된 것은 그로부터이다.
당시 지산, 범물은 거의 논밭이었다. 정부는 식량증산을 위해 농사에도 군사작전개념을 도입해 소위 ‘영농시한작전’을 펼쳐, 모내기는 늦어도 6, 25일까지 끝 내도록했다. 그러나 오랜 관습에 젖은 농민들은 쉽게 따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즘 대통령이 대구에 올 때가 있고 이 때 비어있는 논을 보기라도 하면 지적받을 것이 두려운 시장을 비롯한 간부 공무원들이 쩔쩔 맬 때였다.
그 때 농산담당 공무원들은 수성못에 양수기를 설치하고 물을 펐다. 혹 기계가 고장 나거나 호스가 찢어질 것에 대비해 밤새 곁에서 지킬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물을 퍼서 논을 장만해 놓아도 농민이 나타나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었다. 다급해진 시장은 각 구청의 청소종사원들을 동원해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까지 모내기를 완료했었다. 쌀이 남아돌고 주변이 상전벽해로 변한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혹자는 수성못이 미즈사키 린따로가 조성한 것이 아니라,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의 둔동제(屯洞堤)를 단지 확장하는데 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못은 지금의 능인학교, 녹원맨션이 있던 곳으로 이름이 둔덕지로 바뀌었다가 1980년대 매워 없어졌다. 그 때 못을 메우려고 물을 뺄 때 그곳에 있는 물고기를 수성못으로 옮기기도 했다. 즉 둔동제와 수성못은 별개의 못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 수성못에서는 몇 편의 영화도 촬영했다. 향토 출신의 작가 장정일의 작품으로 미성년 고교생과 조각가의 사랑을 다룬 <거짓말, 감독 정선우>과 대구 출신 김영한 감독이 청소년의 성 문제를 다룬 영화 <위험한 사춘기>, 윤성호 감독의 작품으로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촬영된 <도약선생> 등이 있다.
대구에서 가장 기름진 수성의 풍요로운 들판과 아름다운 못은 상화의 시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곳이나 정작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는 수성못 둑에서 수성들을 바라보면서 구상했던 것이 아니다. 작품이 발표(개벽 제70호)된 것이 1926년 못이 완성되기 1년 전이기 때문이다.
수성못 스토리텔링 자문에 응하면서 못 안의 작은 섬 이름을 공모하자고 제안했었다. 결과 많은 사람들의 응모가 있었고 심사에서 ‘둥지섬’이 당선되었다. 제안자의 의견은 새들의 서식처로 생태적으로 건강한 못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둥지는 모든 것을 아우르듯이 시민 모두를 아우르는 공간이 되기를 염원하는 뜻이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