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임제 서찬규 선생과 낙동정사 회화나무

이정웅 2014. 2. 8. 15:36

 

 

 임제 서찬규선생이 심은 회화나무

 

 임제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낙동정사

 

 달구벌얼찾는 모임에서 감수하고 대구시시설관리공단 (당시 이현희 이사장)이 건립한 상화대십경비

 

 본디 모습이 많이 달라진 달성습지

 

 화원동산에서 본 고령군 다산

 

 사문진교

 

 강정고령보 원경

 

 낙동정사 현판

 

강정마을 뒤쪽의 박리산

임제 서찬규 선생과 낙동정사 회화나무

 

 

 

 

낙동강 정비사업으로 달성보()가 설치되면서 생태계의 보고이자 맹꽁이 국내 최대 서식지인 달성습지가 망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화원동산을 찾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지형이 다소 달라졌을 뿐 크게 우려할 정도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류의 경우 수심이 깊은 곳을 좋아하는 물고기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라는 속담처럼 생육환경이 좋아져 개체가 늘어나고, 반면에 수심이 얕은 곳에 자라는 물고기는 지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그 역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전에 없던 민물가마우지가 날아와 달성습지의 건강성이 오히려 더 좋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태계의 오묘한 기제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환경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거듭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조선 후기 대구의 거유(巨儒)로 이곳 사문진 나룻터 부근에 서재를 지어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며 명작 주유낙강상화대(舟遊洛江賞花臺)’를 남긴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의 낙동정사를 찾았다, 시문은 다음과 같다.

 

같은 배로 달밤에 뜨고 보니 안개 피는 강물은 넘실넘실 넓구나(同舟泛夜月烟水浩湯湯)

흘러가는 것들은 무릇 이와 같아서 만 굽이 꺾이어도 동쪽 바다에 이르는 법(逝者夫如斯萬折必東洋)

호수와 산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이 경관 누가 주재했으랴 (湖山猶古今風物孰主張

이락과 사수 인접해 있어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다네 (伊洛接泗洙寤寐寓羹墻)

선현께서 놀이하고 감상하던 곳 천년토록 그 이름 향기롭구나(前修遊賞地千載姓名香)

부끄럽도다! 나에겐 부지런함이 없어, 마음 밭은 날마다 거칠어 가네 (媿我無勤力心田日就荒)

다행히 좋은 벗이 있어, 흰머리 되도록 함께 도왔네(賴有良朋在皓首共相將)

지란이 향기로운 섬에서 반짝이기에 캐고 캐지만, 광주리에 차지는 않네,(芷蘭暎芳洲採採不盈筐)

쓸쓸이 바라보며 무슨 생각하는가, 미인께서는 하늘 저 쪽에 계시는 것을(悵望何所思美人天一方)

초사를 몇 곡절 마침에 슬프디 슬퍼서 애간장만 저미네(楚辭歌數闋悽悽空斷腸)

강마을 닭이 울려 하기에 노를 돌리며 다시 술잔을 잡는다(江村鷄欲唱回棹復引觴).

 

공은 본관이 달성으로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 글을 배웠다. 1846(헌종 12) 생원시에 합격, 암행어사, 의금부 도사 등 여러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남산동 수동재에서 제자들만 가르쳤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들로 집이 비 좁자 경주김씨(성주 벌지), 경주최씨(대구 동구), 김해김씨(녹동), 김해허씨(장동, 선원), 남평문씨(괘진), 능성구씨(서변, 세천, 동변), 단양우씨(월촌), 달성서씨(단음,옥분, 성주 다산, 산격, 일촌), 담양전씨(행정), 담양전씨(박곡), 동래정씨(문양), 성주이씨(서부곡), 순천박씨 묘동), 영천이씨(동구 지저), 이씨문중(갈산), 이씨문중(장동), 인천이씨(무태), 인천채씨(장동), 전주이씨(청도 대산), 중화양씨(수성구 지산), 진주강씨(대산), 청주한씨(강정), 파평윤씨(문산), 평산신씨(경주, 옥포), 평택임씨(금동) 25개 문중이 5,000여 량(, 3억 정도?)을 출연하여 장소를 화원동산으로 옮겨 1901년 낙동정사를 지어 632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최익현 등과 교류하며 토론 즐겼다고 한다. 원래는 현 정사의 북쪽 낙동강이 바로 보이는 서향이었으나 남향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왜적을 막기 위한 성 쌓기를 제의하였으며, 기호학파를 지지했다. 이런 점을 보면 낙동정사는 이례적으로 대구지방 기호학 확산의 거점이었고, 노론계 문중의 교유 장소이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텅 빈 정사지만 10여 년 전 만 해도 해도 선비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문집과 고문서 5,000여 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증되었다. 이 정사(精舍)가 더 특별한 것은 파리장서 서명자 대구지역 13명 중 서건수, 우성동, 우하교, 우경동, 우승기, 우찬기, 박순호, 이복래, 김용호 등 9명이 임재 문하생이라는 점이다. 정사 북쪽 임재가 심은 것으로 보이는 회화나무가 지금은 선비들의 발길이 끊기고 퇴락한 그래서 달성군이 유원지 정비를 위해 철거하려는 것을 거부라도 하는 듯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