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포충사에서 만난 안동 학봉 종손의 기념식수 주목(朱木)
의병장 고경명 등을 기리는 포충사 원경, 1603년 후손과 제자 박지효 등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1980년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포충사 필암서원과 함께 서원 철폐령에서도 훼철되지 않았다. 고경명 , 종후, 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정기관에 그려진 창의 그림 가운데 있는 분이 제봉 고경명선생이다.
2004년 6월 6일 초유사 학봉 김성일 선생의 15대 주손과 일행 200명이 심은 주목
기념 푯말 재질이 나무라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
광주 포충사에서 만난 안동 학봉 종손의 기념식수 주목(朱木)
광주광역시 남구에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 종후(從厚,1554~1593), 인후(因厚,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1554~1592) ·안영(安瑛,1564~1592)을 기리는 포충사(褒忠祠, 광주시 기념물 제7호)가 있다.
1603(선조 36)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朴之孝) 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으로 사액 받은 대원군이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서원이다.
1980년 사당과 유물전시관(正氣館), 내외삼문,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새로 세우고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으나 옛 사당과 동 ·서재는 본래위치에 그대로 보존했다. 소장된 제봉집 목판(광주시 유형 문화재 제20호)과 문적(文籍)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 21호)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주향(主享)인 제봉((霽峯) 고경명은 대과에서 장원할 정도로 수재였다.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학업에 열중하던 중 임란이 일어났다.
이때 공의 나이 60이었다. 격문을 돌리니 6,000명이 모였다.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6월 13일에 전주에 도착했다.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는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22일에는 여산(礪山)으로 옮겼다. 27일 은진(恩津)에 도달해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점차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금산(錦山)에 도착해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그 후 맏아들 종후는 진주성 싸움에서, 딸은 정유재란 때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이 때 민간의 신분으로 호남에서 창의했던 제봉과 달리 영남에서는 선조가 임명한 관직(官職)을 가지고 활동했던 분이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다.
학봉은 임란(壬亂)하면 선조와 더불어 연상되는 인물의 한 분으로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가서 실정을 살핀 후, 귀국하여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논란에 중심에 서 있던 분이다. 난이 일어나자 류성룡의 천거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의병들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전주성을 방어하는 등 전란수습에 동분서주 하다가 진중에서 병사했다. 7년의 임란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제봉집안도 예외 일수 없었다. 막내아들 고용후는 가솔 50여 명을 이끌고 광주에서 경상도 안동의 학봉 집을 찾아가 위탁했다.
학봉의 손자 김시권은 멀리서 찾아온 고용후에게 ‘자네나 우리나 두 집이 다 같이 난리를 만나서 자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조부님이 돌아가셨으니 서로 마찬가지네. 그렇다고 학문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며 각오를 다졌다.
학봉 손자 김시권은 1593년 진주성에서 할아버지를 잃었고, 고경명의 막내 고용후는 아버지와 둘째 형(고인후)을 1592년 금산전투에서 잃었고, 큰 형(고종후)도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에 패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터여서 두 사람은 동병상련이었다.
이렇게 굳게 언약했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1605년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고 고용후는 1606년(선조 39), 김시권은 1630년(인조 8)에 대과에 급제해 피란시절의 악속을 지켰다.
1617년(광해군 9) 고용후는 학봉의 종가가 있는 안동 부사(府使)가 됐다. 그리고 학봉의 부인(김시권 할머니)과 학봉 큰아들(김집)을 초청해 보은의 잔치를 열었다.
고용후는 큰절을 하며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라며 울먹였다.’ 라고 했다. (2015,9,4 매일신문 논설위원 정인열의 글 중에서)
이런 400여 년의 오랜 인연에서였는지 포충사 경내에는 2004년 6월 6일 학봉의 종손 김종길(金鍾吉) 외 200명이 주목(朱木) 한 그루를 심고 푯말을 세웠다.
비록 작은 나무이기는 하나, 영호남을 대표하는 명문(名門)인 두 집안에 얽힌 아름다운 미담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증표이기도 하지만 동, 서를 화합할 수 있는 단초도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연못 부근의 좌측 끝자락 외진 곳이라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곳이고, 푯말의 재질이 나무라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