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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 ` 금호강 두물머리의 미루나무

이정웅 2017. 11. 30. 09:06

 

낙동. 금호강 두물머리를 지키고 있는 미루나무

강정.고령보

물문화관 디아크

두물머리의 원경

두물머리 근경

낙동 ` 금호강 두물머리의 미루나무

대구의 곳곳이 많이 변했지만 강정도 마찬가지다. 한적했던 강변 마을이 찾는 사람들로 엄청 분빈다. 주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평일도 여전하다. 국내 최대의 강정·고령보, 물문화관 디아크, 해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제, 맛좋기로 소문난 민물고기 매운탕 등 먹고, 볼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일대에 새로 심은 조경수들이 마을의 전통 풍경을 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사에는 다사 팔경이 있다. 그 중 제8경이 강정유림(江亭柳林, 강정의 버드나무숲)이다.

따라서 보를 만들고 일대를 정비하며 새로 심는 나무는 주종이 버드나무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즉 다른 조경지와 차별화 되지도 못했다. 이는 조경가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데서 연유한다. 나무는 땅에 심는 자연물이다. 심기 전에 그 땅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설계되어야 한다. 강정(江亭) 마을의 유래는 부강정(浮江亭)이란 정자가 있었던데 비롯된다.

이 정자는 윤대승(尹大承)이 지었다. 마치 강물 위에 뜬 정자 같다하여 부강정이라 했다고 한다. 당대의 명사 이우(李瑀), 권문해(權文海)의 시가 전해온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 정자도 주인이 죽은 후 폐허로 변했다. 임란(壬亂) 3년 후 1601년(선조 34) 금호 상류 이천에 거유 낙재 사서원이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완락당(玩樂堂)을 짓는다.

이때 준공을 축하기 위해 여헌 장현광을 비롯한 23명의 선비들이 모였다. 혹독한 왜란을 겪은 후라 무사히 목숨을 부지한 것에 감사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배를 타고 선유(船遊)하면서 시회를 즐기다가 날이 저물자 부강정에서 하루 밤을 유숙하게 된다. 이때의 감회를 감호 여대로(呂大老)는 <금호선사선유도서(琴湖仙査仙遊圖序)>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날이 저물어지자 배를 부강정에 대니 이 정자는 윤 진사 대승(大承)이 지은 것으로 댓 마루와 기와는 병화(=임진왜란)로 불타버렸고 윤 진사가 세상과 인연이 끊어진지 10년도 채 못 되었건만 거친 집이 저녁 비에 젖어 있었다. ---어둠이 다가오자 여기에서 투숙코자 하였으나 방이 몇 칸 안 되어 일행들이 다 잘 수 없기에 나와 사빈(士彬, 이규문)은 돌아와서 이 진사 학가(學可, 이종문)의 짐에서 잤다. ---”고했다.

위의 글을 통해 정자의 주인은 윤대승이었으며 임란 때 많이 파괴 되어 참가자 23명을 다 수용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3명을 제외한 20명은 잘 수 있었으니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부강정은 하목정 주인 낙포 이종문의 아들 이지화(李之華, 1588~1666)가 물려받아 새로 지으면서 당시 조선의 최고 문장가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 1589~1670) 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지화는 대과에 급제하고 영남인으로서는 비교적 고위직인 예조·이조 참의에 올라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다가 낙향했다. 이곳은 두물머리 일대는 신라왕들도 선유를 즐길 만큼 경관이 수려했다. 새로 주인이 된 이지화는 스스로 부강거사라 자호(自號)할 정도로 강안 제일의 정자로 만들려고 했다.

또한 1605년(선조 38) 3월 한강 정구는 고령 어목정에서 출발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노다촌-부강정-낙재-선사-부강정에 이르는 경로로 6박 7일 주행(舟行)한 적이 있었다. 성묘와 사제 간 화합을 위한 행사였다. 박정번, 곽근, 이후경, 이학, 등이 동승했고 노다촌에서 하루를 묵은 일행은 8일 오후에 척성을 지나 부강정에 도착했다. 당초 오기로 한 날자보다 빨리 오자 제자 서사원은 매우 당황했다.

“작은 배를 저어 강 입구로 급히 내려가니 선생(=정구)의 행차는 이미 부강정으로 들고 있었다. ” 라고 했다. ”

이날 정구는 부강정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이때 모인 사람은 박정번, 곽근, 이후경, 이학, 이난귀, 서사원, 손처눌, 정선, 곽재겸, 손처약, 서사술, 도응유, 도성유 등 70명에 이르렀다. 대곡 선영을 찾아 치제(致祭)하고 다시 부강정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 성주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정구는 부강정에서 2회 묵었다.

이런 점을 비추어 볼 때 부강정은 당대 강학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윤대승, 이지화 후 쇠락의 길을 걸어 영조 후기에 간행 된 <대구읍지> 누정(樓亭) 조에는 부강정이 빠져있다. 그 즈음 폐허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비들에게는 잊혀 질 수 없는 곳이기에 조선후기의 지역의 선비 서호 도석규에 의해 다시 시로 언급된다. 그는 이 지역의 산수를 사랑해 일대를 서호(西湖)에 비정하고 서호십곡을 노래하였는데 첫 번째 시제가 부강정이다.

첫째굽이 부강정에 강물은 흐르는데 / 윤씨가 가고 이씨가 성하도다.

유유한 인간사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 머리 돌려 백사장의 백구에 물어볼거나 ”라고 했다.

이러한 옛 영화를 증언이라도 하듯이 두물머리에 미루나무(이태리 포플러 등 포플러의 별칭) 한그루가 우뚝 서있다. 유람선 달성호를 타고 이곳을 바라보면 동쪽에는 신이 내린 자연물 미루나무가 서쪽에는 인간이 만든 우수한 건축물 디아크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미루나무는 바람이 불 때 수많은 이피리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초간 권문해의 부강정 시는 다음과 같다.

우뚝하게 높은 정자 푸른 강변에 있는데, / 빛나는 가문의 후손을 따라 명승지에 왔도다. / 신라의 왕손 노닐던 언덕에 풀이 자라고, / 강은 서시(西施)처럼 아름답고 날씨 화창하구나. / 들쑥날쑥한 고목들은 아침 안개가 감싸고, / 오고 가는 상선은 저녁연기 띠고 있네. / 속세 벗어난 강산을 그대가 독점하였으니, / 이제부터 작은 신선이라 불러주어야 하리라.

그렇다 왕이 주행(舟行)하고 지역의 명사들이 시회와 강학했던 사실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몇 명이나 기억할까. 오직 미루나무만 푯대 같이 서서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최근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복원이 논의 되고 있다는 풍문이 있다. 규모를 알 수 없고 위치마저 비정할 수 없다하나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현 여건에서 가장 적당한 곳에 지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