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칠곡이야기

금호동(대구시 북구)이야기

이정웅 2019. 7. 31. 16:55

금호동

 

 

, 연혁(沿革)과 유래

동쪽으로 장태실과 서쪽으로 사수동, 남쪽으로 금호강, 북쪽은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와 접해있다.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금호JC가 있으며 강원도 춘천시와 대구시를 잇는 중앙고속도로의 시발점으로 마을의 남북을 관통한다.

칠곡읍지에 의하면 조선 후기 문주방(文朱坊) 문주리(文朱里)로 본관이 선산(善山)인 김자창(金自昌)과 경주인 이용섭(李龍燮)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문주면, 팔거면, 퇴천면 등 3개 면이 칠곡면(漆谷面)으로 합쳐질 때 금호강 변에 있다고 하여 '금호동(琴湖洞)'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는 문주면장 이봉기씨가 주민 이서기씨에게 작명을 요청하자 금호동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 산과 강, 골짜기

 

0, 문주산

성리학자 한강 정구가 칠곡 노곡에서 이곳으로 와서 산신제를 지냈다는 문주산  


유학자 한강 정구가 1614(광해군 6) 1월 북구 사수동으로 옮겨 와서 처음으로 산신에게 제를 올린 산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민들은 오늘날까지 이곳을 당산(堂山)이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 문주방(文朱坊), 일제강점기 문주면(文朱面)이었던 이곳의 이름이 유일하게 산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한강집의 당산에 올린 제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고합니다. ()는 일찍이 노곡 남산촌에 살 적에 겨우 두 해는 넘기고 뜻밖에 화재를 입어 서적이며 가재도구들이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나머지 차마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 없기에 지금 본산의 기슭에 와서 새로 터를 잡아 사당을 세우고 살림집을 지어 노년을 마칠 계획을 하였습니다.

신령께서는 보호하고 도우시어 저로하여금 편안하게 생업을 영위하게 해 주신다면 아마도 큰 허물없이 평생의 뜻을 온전히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술이며 과일로 신령께 호소하니 굽어살피시고 흠향하소서 삼가 고합니다.”

 

그러나 한강 정구의 이러한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풍병에 걸리는 등 6년을 힘겹게 살았다. 그러나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동래에 온천욕을 다녀오고 오선생예설등을 비롯해 예학 관련 저술을 집필했으며 사양정사를 손수 지어 많은 제자를 길러내는 등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키다가 1620(연산군 12) 사양정사에서 돌아가셨다.

 

0, 잠산


주민들은 수리봉으로 부르고 있으나 지도에는 잠산이라고 표기 되어있는 잠산

 

높이는 198.5 m이며 금호동과 팔달동에 걸쳐있고 정상은 경계지점에 있다. 그러나 팔달동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금호동 오른쪽 산이고 서대구나들목에서 금호대교를 건너 안동으로 가는 방향으로 역시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다. 금호JC공사로 비탈면이 많이 깎였다.

지도상에는 일대에 3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나는 지금 말하는 잠산이고, 그다음은 매천동의 수리봉과 매봉이다. 그러나 인근 사람들 특히, 금호동의 연로한 사람들조차 잠산이라는 이름을 잘 모르고 있다. 한글로 잠산(북구 관광 안내지도, 2019)이라고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달리 금호동 사람들은 수리봉이라고 한다.

산세가 다 자란 누에가 머리는 치켜든 형국이다. 따라서 이런 연유로 누에 잠(), 뫼 산()”을 써서 잠산(蠶山)이라는 불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내맥(來脈)은 명봉산에서 뻗어 내려와 옥녀봉, 태복산을 거쳐 끝머리가 금호강에 닿아 끝난다.

금호동 쪽의 산록 8부 능선쯤에 범덤(더미)이 있어 한때 범(호랑이)이 살아 일부 주민들이 목격하거나 우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곳 벼랑에는 독수리가 살고 있어 수리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작은 샘골, 큰 샘골, 물풀골 등 여러 개의 골짜기가 있다.

 

0, 보리뫼산

 

경북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금호 JC에서 서북쪽에 보이는 산이다. 금호동 산 104-3번지 일대로 금호JC가 건설되면서 비탈면이 많이 깎였다. 문주천이 서북쪽을 흐르며 주변의 산들과 단절된 독산(獨山) 형태를 취하고 있다.

 

0, 문주천


 

태복산에서 발원하여 문주골을 흘러 문주마을 가운데를 통해 금호강으로 유입된다. 옛날 논농사를 지을 때 요긴하게 이용했으며 미꾸라지가 많아 잡아서 서문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금호지가 건설되고 영농이 밭농사 위주로 바뀌면서 활용도가 크게 떨어지고 지금은 수량도 많이 줄어들었다.

 

0, 문주골

금호동 북쪽으로 잠산과 백새공원 사이의 골짜기를 일컫는다. 대구국제사격장과 금호지가 있으며 문주천의 발원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금호마을을 관통하여 금호강 입구에서 끝이 난다.

 

0, 불미골

 

대장간이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풀무의 사투리 불미골로 불렀다고 한다.


사수동에 있는 베네딕도수녀원 동편, 문주산 서쪽이다. 옛날 대장간이 있어 고열로 쇠를 녹이는 풀무(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또는 녹이기 위하여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가 있어 풀무골이 불미골이 되었다고 한다

 

0, 배암골

길이 꾸불꾸불하여 뱀이 기어가는 형상과 같이 생겨 배암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금호동과 사수동을 잇는 골짜기로 좁은 산길이다. 사수동 사람들이 칠곡면사무소로 볼일 보러 가는 지름길이었다. 꾸불꾸불한 길이 뱀이 기어는 가는 모습과 같아 배암골이라 했다고 한다. 중턱에 150~200년 전에 축조된 저수지 문호지가 있다.

 

0, 솔답배미

 

금호119안전센터 동쪽으로 문주천에 놓인 솔답배기교 건너편 새로 조성된 주택지이다. 지금처럼 가옥이 들어서기 전 전 일대는 솔답으로 불렀다. 배미는 논을 말한다. 즉 솔답지역의 이라는 뜻이다.

소설가 박영한의 대표작 우묵배미 사랑의 우묵배미는 우묵하게 들어간 논을 말하는 것과 같다.

 

0, 금호지

한때 농업용저수지였던 금호지  


북구 금호동에서 대구국제사격장으로 가는 길 왼쪽, 문주산 오른쪽에 있는 농업용 저수지이다. 선산(일선)김씨 농암파 금호종친회 사유지(私有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천연기념물(330)로 지정된 수달이 서식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일대가 도시화 되면서 농업용수 기능이 축소되었다.

 

문화재 및 문화유산

 

0 경모재

선산(일선) 김씨 농암파 금호종친회 재사 경모재  


문주길 19에 있는 명문 선산(일선)김씨 농암파 금호종친회 재사이다. 시조는 순충공(順忠公) 선궁(宣弓, 904-946)으로 벼슬이 고려 정난보국 벽상공신 문하시중(靖難輔國 壁上功臣 門下侍中)이다.

아버지는 일선군사(一善郡事) 체의(體宜)로 신라 46대 문성왕의 7대손이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선산에 머물려 군사를 모집할 때 불과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지원하니 태조가 기뻐서 활()을 하사(下賜)하고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지어주었다.

파조는 농암(籠巖) 김주(金澍 ?~?)로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김원로(金元老)이며, 어머니는 수주김씨(水州金氏)이다. 공양왕을 섬겨 벼슬이 예의판서에 이르렀다. 1392(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으로 향하여 통곡하며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 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할 것과 조복(朝服)과 신을 부치고,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후손들은 조복 등 유품을 보낸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자 명나라 태조는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평생 그에 해당하는 녹(祿)을 주었다고 한다. 중국의 형초(刑楚)에 살았고, 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전한다. 저서로는 농암일고(籠巖逸稿)가 있다.

금호동 입향은 전주 판관으로 임란 중 창고를 열어 고을 주민들을 구휼(救恤)했던 24세 김안국(金安國)이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世川里)에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증손인 27세 통덕랑(通德郞, 조선 시대, 5품 문관 품계) 김자창(金自昌)이 금호강을 건너 문주(文朱, 현 북구 금호동(琴湖洞)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른다.

재사 경모재(景慕齋)19933월에 세워졌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많은 헌법학자가 개헌(改憲)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정계로 진출할 때 끝까지 교단을 지킨 김철수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독농가이자 대구 칠곡향우회장 김정립 등이 후손이다.

 

 

0, 갱빈나루터·금호나루터

금호, 사수사람들은 물론 칠곡 지천면 달성군 하빈면 사람들도 이용했다는 금호나무  


, 대구시 팔달빗물펌프장(북구 사수로 586-106, 금호동 535-1)에서 배로 금호강을 건너 현재 대구시 북부하수처리장 부근(금호동 544-26)에서 내려 서구 이현, 비산동을 통해 서문시장 등 시내 쪽과 북구 금호동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이용했던 나루터였다.

금호나 사수 사람들은 물론 칠곡군 지천면, 달성군 현내 무등마을, 멀리는 김천 사람들도 이용했다고 한다. 주로 배추, 무 등 농작물을 서문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경우가 많았지만 중, 고교는 물론 대학생들도 이 나루터를 통해 등하교하였으며 탈 때마다 현금을 내지 않고 봄에는 보리, 가을에는 벼를 뱃사공이 집집을 찾아 거두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까지 운행했는데 마지막 뱃사공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는 할 일 없이(?) 낚시를 즐기는 한 젊은이와 친하게 지냈다. 훗날 그 젊은이의 형이 실권자가 되자 그 역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뱃사공 역시 소위 출세한 젊은 낚시꾼의 각별한 배려로 그동안 해 오든 뱃사공 일을 집어치우고 서울로 올라가 크게 출세했다는 것이다.

서구의 이현동은 한자로는 배 ()”, 고개 (”)자를 표기한다. 유래도 옛날에는 현재의 이현동에 강물이 흘렀으며 그 강가에 오래된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에 배()를 묶었던 곳을 중심으로 이현동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가르뱅이와 새방골에서 이 마을로 오기 위해서는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배고개 마을이라 불러졌다. (서구청, 홈페이지)” 고 한다. 그러나 이유래 역시 배나무와는 상관이 없다. 금호나루터로 배를 타러 가는 고개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한자로 표기한다면 이현(梨峴)이 아니라, 선현(船峴) 배고개이다.

 

0, 금호동 79번지 유적

 

고려 시대 생산유적으로 영남문화재연구원이 2007, 1, 2~ 3, 24일까지 발굴했다. 대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금호강의 북쪽이며 문주골 안쪽 해발 205, 3m 봉우리 일명 “100세공원의 남쪽으로 금호강을 향해 두 갈래로 나눠 저 뻗어 내리는 구릉 사이 즉 금호동 79번지에 위치한다.

대구시가 사격장을 건설하기 위한 발굴조사였다. 조사결과 고려 시대 건물지, 수혈유구, 구상유구, 토기 가마, 노지, 적심군, 주혈 및 근대 토광묘 등 모두 39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고려 시대 토기 편, 어망추, 종지, 병 등이 출토되었다.

 

0, 문주면 사무소 자리

 

조선 후기 문주방으로부터 구한말 면() 제도가 시작되면서 문주면의 소재지로 오늘날 팔달동, 매천동, 사수동을 관할(管轄)했다. 1914년 칠곡면에 편입되면서 치소(治所)의 기능을 상실했다. 현재 금호동 224-1번지 일대로 지역의 토박이 김정립(73)씨가 젊은 시절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면사무소 창고를 헐었다고 한다.

면사무소 앞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5그루와 오래된 회화나무 1그루가 있었는 데 중앙고속도로건설부지에 편입되어 사라졌고 문주천 가에 사람 9명이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아주 큰 왕버들도 언젠가 태풍으로 넘어져 베어버렸다고 한다.

 

주요시설물

 

0, 대구국제사격장


천혜의 장소에 건설된 대구국제사격장

   

대구광역시의 공기업인 대구시설공단이 운영한다. 동구 봉무동에 있던 것을 사격 스포츠의 대중화와 대구시민들의 여가활동, 색다른 체험 거리를 제공하고, 사격 꿈나무 육성을 육성하기 위해 2008년 이전했다. 이곳은 사격 중 발생하는 유탄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고, 소음의 피해가 없는 최적의 장소다.

대구시에서는 안전한 사격장을 건설하기 위해 가창 등 후보지 5개 곳을 선정해 현장조사와 항공사진 등 면밀한 검토를 했다. 일대는 원래는 범골, 종자골로 문주골짜기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 사람들이 발길이 뜸했던 곳이었다이용자들은 이 천혜의 장소를 두고 하늘이 감추어 두었던 비장(秘藏)의 땅이라고 한다.

191,300m2 (57,968)의 부지에 연건평 17,021m2 (5,149)로 사업비 49,178백만 원이 투입되었으며 20081125일 준공했다.

당초 대구광역시 사격연맹이 운영하다가 2010년부터 대구시설공단이 수탁 받았다. 이후 시민들의 여가활동은 물론 2010 세계소방관경기대회와 2015 세계군인체육(사격부문)대회, 2015년 제96회 전국체육대회 등 굵직굵직한 국제 및 국내행사를 치렀다.

시민들에게 늘 개방되어 있으며 실탄사격은 나이에 제한을 두어 만14세 이상만 가능하다. 이때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평가에서 최우수 공공체육시설로 선정되어 장관상을 수상했다. 주요시설은 다음과 같다.

구 분

주 요 시 설

경기장

실내사격장

10M(80사대), 25M(60사대), 50M(80사대), 10M결선(10사대)

클레이사격장

병행(트랩스키트 3)

관광

사격장

실탄

권총클레이사격장

실탄 권총 6사대, 클레이(아메리칸) 1

공기소총사격장

실탄 공기소총 10사대

비실탄

전투체험사격장

주경기장 1(1,784), 보조경기장 1(459)

스크린사격장

레이저스크린 6사대, 비비탄사격 4사대

VRBB탄사격장

VR사격 4사대, BB탄사격 4사대

기타

부대시설

복합체육시설(족구농구장)

회의실, 숙소, 식당, 잔디광장, 선수전용 헬스장 등

 

 

0, 중앙고속도로

 

금호동에서 시작되는 중앙고속도로는 총연장은 280, 도로 폭은 4차선 23.4m로 나들목은 칠곡·다부·가산·군위·의성·일직·안동·예천·영주·풍기·단양·매포·남제천·서제천·신림·남원주·호저·횡성·홍천·춘천 등 20개소이며 분기점은 금호·만종 등 2개소에 설치했다.

1단계 공사는 대구-안동(87), 제천-원주(38), 홍천-춘천(26) 간 총 151로 총 12,530억 원의 공사비가 소요 되었다. 2단계 공사는 안동-제천(86), 원주-홍천(43) 129로 총 11,153억 원이 소요되었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그동안 낙후되어 있던 강원지역과 경상북도 북부지역이 개발되고 중부내륙지역의 자원개발 및 지역개발이 촉진되었다. 물자 운송시간이 단축되어 지역경제에 큰 이익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