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도선국사와 옥룡사지 동백나무숲

이정웅 2008. 4. 7. 21:34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비조 도선국사사가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부족한 지기를 보완하기

위하여 삼었다는 옥룡사지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489호)

 붉은 동백나무 숲길을 걷고 있는 소년과 어머니

 발굴조사하기 위해 파헤쳐진 옥룡사지 스님은 이 곳에 자리를 잡고 35년 간이나 주석했다.

 

광양(光陽)은 그리 낮선 곳이 아니다. 30여 년 전 식량증산이 정부의 가장 큰 정책이었던 시절, 쌀 생산에 필수적인 저수지 등 수리시설이 부족했다. 정부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대일(對日)청구권자금 중에서 일부를 빗물로만 농사를 짓는 전국의 천수답 지역에 소규모 관정(管井)을 파고 그 곳에 고인 물을 퍼서 논에 댈 수 있도록 양수기(揚水機)를 도입해 각 시·군에 보관시켰다가 농민들에게 대여해 논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을 수 있도록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의 이런 정책이 일선 행정기관에 이르러서는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박대통령은 처음에는 시·도가 산하 시·군공무원을 동원해 A군 공무원은 B군을, C군의 공무원은 A군을 상호 교환 점검시켜 관리상태를 개선하려고 했으나, 시·군이라는 소속은 달라도 같은 도(道) 산하에 근무하기 때문에 공적으로나 사적인 연줄로 적발해서 시정하기보다는 눈감아주는 일이 발생 대통령이 의도한 뜻과 같이 철저한 점검이 이루지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두 번째 시도한 방법이 점검 대상을 시·도로 확대하고 A도는 B도를, B도는 C도를 점검하도록 한편, 점검반 편성도 농림부나, 농촌진흥청 등 중앙공무원을 포함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 때 나는 경북도 산하 대구시 공무원이었지만 전라남도 점검반원으로 차출되어 광양군에 배치되어 10여 일 머문 적이 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풍수지리설의 비조(鼻祖)이자 지금도 많은 지관들의 입에 회자되는 도선국사가 생애 중 마지막 35년을 광양의 옥룡사에 머물렀는데 그 곳이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을 접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하찮은 서민의 묘 터 잡기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던 당신이 살던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  방문한 것이 두 번째다. 따라서 관정, 양수기점검반으로, 옥룡사지 답사로, 이번에는 스님이 지기(地氣)를 보완하기 위해 심었다는 동백나무숲을 보기 위해서였다. 출발할 때 비가 내리고 있어 다음 기회로 미루려고 하다가 버스를 탔다. 편리한 교통덕택인지 2시간 30분 걸렸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던 비도 멈춰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양농협 앞에서 추산행 시내버스를 탔으나 기사가 옥룡사지의 위치를 몰랐다. 고승의 수도처이자 천연기념물 (제489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 있는 지역의 명소를 시내버스 기사가 모른다는 점이 아쉬웠다. 다행히 그 마을에 산다는 어르신이 있어 따라 내렸다. 예전처럼 동백꽃이 많이 피지 않는다고 했다. 머릿기름이나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열매를 두드려 꺾인 가지가 많아야 꽃이 많이 피는데 지금은 포마드나 식용유에 밀려 열매 따는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한다. 그 분과 헤어지고 조금은 익숙한 가파른 길을 오르니 울창한 동백나무숲이 전개되었다. 제철을 맞았는데도 생각처럼 꽃이 많이 맺은 것이 아닌 점은 그 분의 설명으로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아쉬웠다. 카메라에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르니 이게 웬일인가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 가. 자주 올 수 없는 먼 길을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참으로 난감했다. 몇 장 더 찍다가 포기하고 위로 향했다. 그런데 20여 년 전에 왔을 때에는 옥룡사라는 편액을 건 절집이 한 동 있었는데 일대는 깡그리 밀리고 사적지(제407호)라는 안내판만 한복판에 서 있었다.

유서 깊은 절터였으니 광양시가 발 빠르게 사적(史蹟)으로 지정한 것 같으나 터만 보존할 것이 아니라 절을 복원해야한다는 생각이다.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범종단차원에서 하든지 그것이 어렵다면 스님이 창건했다는 서울의 도선사를 비롯해 전국의 수많은 사찰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일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스님을 팔아 돈을 챙기고 있는 지관들도 동참해야 한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가족끼리 온 분이 있어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기꺼이 협조해 주어 그 분의 카메라로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도선국사는 속성은 김씨로 827년(흥덕왕 2)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출가해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고 846년(문성왕 8) 곡성의 태안사에서 신라 구산선문의 한파인 동리산문의 개산조(開山祖) 혜철(惠徹 또는 哲)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제자가 된 분이다. 운봉산, 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며 구도행각을 하다가 864년(경문왕 4) 이곳 백계산으로 들어와 옥룡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절터는 원래 큰 못으로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스님이 불력으로 모두 쫓아냈다고 한다. 그 즈음 주변 마을에 눈병이 돌고 숯을 한 섬씩 지고 가 못을 메우면 눈병이 낫자 모두들 그렇게 해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 부분이 허하여 동백나무를 심어 이를 보완하였다고 한다. 스님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 스님은 예언가 내지 풍수지리가로 알려졌다. 스님은 태조 이후 고려왕들에게도 극진히 존경을 받았는데 인종이 국사로 추증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898년(효공왕 2년) 71세로 입적했다.

풍수지리서의 일종인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이 스님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이름만 빌린 가짜라는 설도 있다. 스님이 돌아가신지 일천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풍수지리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일부 지관들은 스님의 이름을 팔아 명당 장사로 큰 돈을 벌고 있으며, 일부 졸부들과 심지어 대통령 등 고관이 되려는 사람들의 욕심과 맞물려 설익은 지관들마저 활개를 치고 다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그러나 스님이 주장한 비보(裨補)사상은 광대한 면적을 가진 중국과 달리 좁은 우리 국토에는 명당이 그리 많을 수 없으며 그 것이 집터이든 묘 터이든 토지이용에 결함이 있으면 보완해서 사용하면 명당이 될 수 있다는 뜻일 뿐이라고 한다. 오늘날 폐허로 남은 옥룡사지가 천하에 명당이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아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