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은퇴자들의 고민은 빨리 진행되는 노화(老化)와 사회와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고민이라 할 수 있을 것으로 지인이나 옛 동료로부터 오는 청첩장일 수도 있다. 수입이라고는 연금 밖에 없는데도 많은 청첩장을 받으나 일일이 다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낸 분들의 면면들을 보면 모두 축하 해주고, 축의금도 많이 보내 주고 싶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사(吉事)에 주로 오고가는 축의금의 사전적인 뜻은 “축하 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내는 돈” 이지만 대개는 목돈이 필요할 때에 서로가 조금씩 도와줌으로 빚지지 아니하고 대사(大事)를 잘 치르라는 농경시대의 미풍양속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무에게나 무분별하게 살포하여 비난 받는 일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의로 축의금을 주고받고 있다. 따라서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기장(記帳)을 해 두었다가 큰 일이 닥쳤을 때 상대방에게 연락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성격이 치밀하지 못했던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둘째 아이 장가들였을 때 받은 부의금이나 축의금을 정확히 정리해 놓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그 동안 선배나 동료들의 길사나 흉사에 보냈던 부의나 축의금 역시 기록해 놓지 아니하였었다. 따라서 누구 청첩장을 보내와도 내가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알 수 없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답례를 하고 있다.
첫째, 일가친척, 고향 친구, 동향인, 학교 선후배 크든 작든 은혜를 입은 사람, 지인 둘째, 살아오는 동안 계속해서 긍정적인 유대관계를 가졌던 사람, 셋째, 현직에 있을 때 같은 직렬의 동료나 다른 부서에서 근무했었지만 호의적이고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을 위주로 하고 이와 달리 직위가 현저히 높아 내가 축의금을 보내지 아니더라도 여유가 있고 또한 축하해 줄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 재력이 있어 타인의 도움 없이도 대사를 치르는데 지장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퇴직을 하고 난 후에는 태도를 달리했다.
아직 혼례를 올리지 못한 아이가 있어 필요한 경우 나도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축의금을 보낼 때에는 일일이 신상을 기록을 했다. 이런 와중에 독신으로 지낼 것 같았든 큰 아이가 참한 처녀를 데리고 와서 장가를 가겠다고 했다. 앓던 이를 빼는 기분이었다. 사돈될 사람과 상견례를 하고 서둘러 날을 잡아 혼례를 치르기로 했다. 이미 대비를 해왔던 처지였기에 혼례비용은 크게 문제될 바 없었으나 누구누구에게 청첩장을 보낼 것인지를 정하는 일과 식사할 분 즉 예식에 참가할 분이 몇 명이나 될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청첩장의 홍수시대에 받아서 기쁜 나빠하지 않을 사람, 다시 말해서 뜻 깊은 혼사를 축하해 줄 사람에게만 보내야 하는 데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지가 또한 정승 말 죽으면 사람이 넘쳐도 정승이 죽으면 사람이 없다는 속담처럼 미관말직으로 근무하다가 은퇴한 나에게 과연 몇 분이 와 주실 건지? 감이 잡히지 아니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만만한 것은 일가친척과 고향친구, 고교동기, 퇴직 공무원 모임회원들이었고 다음은 퇴직 후 지금까지 축의금을 전달했던 분들 다음은 재직 중 같은 배를 타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던 직장 동료였다. 후배에게 명단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많지 않는 인원이었음에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다소 있었다. 자세히 보니 퇴직 후 그 동안 새로 들어 온 직원들이었다. 비록 선배였기는 하나 얼굴도 모르는 그들에게 결례를 할 수 없어 이들 역시 제외했다. 또 다음은 평소부터 나를 이해해 주고 아껴주셨던 분들을, 다른 실과에 근무했으나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에게 보냈다. 축의금을 보낸 분이라도 마음에 없었으면서 상관(上官)이었기에 할 수 없이 보냈다던가. 체면치레로 보낸 분들은 제외했다. 아이와 아내 친구들을 제외하고 약 4백여 명 정도였다.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는 인물들로 소위 말하는 내 60평생의 인맥(人脈)이나 이들 중 상당수도 나만의 짝사랑이지 청첩장을 받은 분들이 모두 나의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으로도 생각되었다. 주소불명으로 되돌아오는 청첩장도 있었다.
따라서 보낸 분들이라 하여 다 올 것도 아닐 것이므로 일가친척과 아이와 아내 친구를 포함해 3백 명으로 잡고 식권을 구입해 배부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1백 여 명이 추가되어 비용은 늘어났으나 아직도 인간답게 여겨 찾아주는 분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우쭐해졌다. 혼례 또한 전통식이라 오랜만에 옛 풍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는 말과 하객들이 많았다는 칭찬을 들어 기분이 더 좋았다. 혼례를 공휴일을 택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낭비적인 요소도 많다고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오래 동안 못 만났던 친구, 친척, 선후배, 동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간과 할 수 없음을 새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해결했다는 안도감으로 그 날 밤 둘째 아이와 함께 축의금 명부를 정리했다. 결산하는 이미도 있지만 고맙다는 인사 장을 보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후일 기회가 되면 조금마한 성의라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박애자 대구국학원장, 전 고령농촌지도소장 정규팔, 홀로서기의 작가 서정윤, 대구에스파스 정호열국장, 경북도 농업기술원 김병출과장, 달서구청 김홍연담당, 대구생명의 숲 하종호 공동대표, 씨 ·엔 조경 신영호부장, 문화예술회관 최규목 담당, 박성철 전공노 직전회장 차량등록사업소 박대현님, 전 남구청근무 김대열님, 성석인 노보텔 이사, 나무 까페 김화야님, 신평어린이집 박원게님, 대구시청의 남해진·이창용 보좌관, 최연화님, 서울의 손국희님 등 이었다. 반면에 퇴직 후에도 꾸준히 거래처를 알선해주며 사업을 도와주었던 K, N사장, 퇴직 후 고문을 맡아 달라거나 농장 책임자가 되어달라는 투로 잘 보이려(?)했던 A와 B사장, 자녀 혼사에 축의금을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조그마한 배려가 영향을 끼쳐 승진한 X사무관, 두 번 씩이나 했어도 외면한 사람들 등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어 세상인심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따지고 보면, 보통 3만원 많아야 5만원인데 몇 분에게 축의금을 못 받았다하여 혼사를 치르지 못 할 것도 아닌데, 그 걸 두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을 비우고 살아왔다는 말도 빈말이었음을 자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하객이 예상했던 것 보다 많아 비록 물러나있지만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하고, 지금까지의 삶이 헛되었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서운했던 감정은 빨리 잊어버리고 고마운 사람들의 정성은 마음 깊이 담아 오래오래 잊지 아니하고 보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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