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암 정인홍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부음정
내암의 딸 정씨가 안주인이 될 뻔한 도곡재 안채
순천박씨 묘역에 있는 숙인서산정씨의 묘
골짜기 마을이라고 하면 흔히 후미진 곳쯤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대구에는 반촌(班村)으로 이름난 세 마을이 있으니 동구의 옻골, 달성군의 못골, 하빈면 묘골이다. 이 마을들은 각각 경주최씨, 서흥김씨,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특히, 묘골은 사육신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개척한 마을로 충신의 후예답게 손자 대에 이르러 박충후(朴忠後, 선무 원종 1등), 충윤(忠胤 선무 원종 3등), 충서(忠緖, 선무 원종 3등) 등 3명의 공신을 배출하여 명문의 기반을 더욱 확립했다. 이어 출중한 선비가 태어나니 ”달성(대구의 별칭) 10현“의 한 분인 도곡(陶谷) 박종우(朴宗祐, 1587~1654)이다.
도곡은 묘골 임란 3 공신의 한 분이자 제용감 주부 박충윤(朴忠胤)의 아들로 어머니는 광주이씨로 이광복(李光復)의 딸이다. 서사원, 정구의 문인이다.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90세 된 양친 때문에 참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열 가지 대책을 경상감사 심연(沈演)에게 전했다. 1637년(인조 15)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하여 통곡하고, 평생 지어 모은 초고(草稿)를 태워버렸다.
이후 숭정(崇禎) 처사를 자임하며 종신토록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아들 5형제 이름의 돌림자를 숭(崇) 자로 했을 만큼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다. 문음(門蔭)으로 부사과(副司果)가 되었고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도곡문집』과 편저인 『병자록』이 있다.
도곡은 임란 시 의병 3,000명을 이끌고 합천, 성주 일대를 누비며 국난극복에 앞장서고 광해군 집권기 영의정을 지낸 당대 최고 실력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딸을 며느리로 맞는 사돈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혼인은 도곡의 일방적인 선언으로 파혼하고 만다. 『도곡선생문집』 연보 1621년 (광해 13, 선생 35세) 조에 그 내력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2월 25일 선생이 맏아들 장(樟, 나중에 章으로 개명)의 혼사 일로 행장을 꾸려 한양에 갔는데 혼례일은 바로 3월 모(某)일이었다. 가야산(정인홍을 말함)은 당시에 명망과 지위로 한 나라의 관심이 쏠리고 있었고 다만 공은 영남에 중망(重望)이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관계를 맺은 것이다. 가슴속을 드러내 말이 나랏일에 이르자 한 통의 편지를 보여주는데 바로 인목대비의 폐위를 논의한 것이다. 장차 편파적이고 지나친 자질구레한 말로 공의 의중을 떠보아 한편으로는 자기 당원(黨援)으로 세우고자 하였고, 한편으로는 폐비에 대한 상소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공은 묵묵히 한마디 말없이 곧장 신부를 만나보기를 청하여 ‘나는 먼 지역의 한미한 선비이니 어찌 조정의 일에 대하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평생토록 공부한 것은 한 부의 『춘추(春秋)』에 있을 뿐이며, 근래의 일은 더욱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인께서 의리에 어긋나는 주장으로 비록 나를 끌어주려고 하지만 나는 뜻을 굽혀서 따라 뒤섞이고 싶지 않습니다. 의리가 서로 어긋나니 인척의 정의(情誼)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신부에게는 이미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어 의리상 지아비를 따라야 합니다.
나 역시 지극히 자애로운 인정이 있어 차마 버릴 수 없으니 거취는 신부 스스로 결정할 일입니다.’라고 하니 신부는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맏아들 숭장이 곁에서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나 ‘부친께서 지극히 자애로운 은혜로 신부를 데려가고자 하지만 저는 친영(親迎)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부를 돌아보며 ‘훗날 죽은 뒤에 선영에 장사는 지내 주겠소.’ 라고 하고 그날로 짐을 꾸려 고향 집으로 돌아와 편지로 절연(絶緣)을 알렸다.”
<출처 : 도곡집>
즉 결혼식을 한 달여 앞두고. 인목대비 폐위 등 현안에서 내암과 의견 차이가 있자 도곡이 먼저 절연(絶緣)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혼인할 날짜를 잡아두었으니 두 사람 간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내암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아들 숭장이 거절한 대신에 사후(死後)에 선영에 장사지내는 것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도곡의 절연 배경에는 이외에도 스승인 한강 정구에 대한 내암의 지나친 비판,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문묘 배향을 반대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유학자의 명부)에서 삭제되는 등 사림(士林)의 반발도 고려했을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내암은 물론 그의 가족과 제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 갔다. 그해 9월 신부(?) 정씨도 죽었다. 도곡은 아들 숭장에게 약속한 대로 선영 아래 장사 지내도록 하고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 혼례를 치르지도 아니하였지만, 내암의 딸은 한때 약혼자의 선영에 묻히게 되었다. 당시 도곡이 파혼하지 않았다면 그 화(禍)가 도곡은 물론 아들 숭장에게 미쳤을 것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했다.
이는 도곡이 평소 절개를 중시하고 의리에 따라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다사읍 문산 순천박씨 묘역에는 그래서 시신(屍身)으로 시집(?)온 나라 안에서 전무후무할 무덤이 전해 온다. 공교로운 것은 정치적으로는 두 분이 서로 견해가 달랐으나 자연을 대하는 시각은 비슷한 것 같아 나무에 대한 시를 남겼으니 다음과 같다.
영송(詠松) -내암 정인홍
한자 남짓한 한그루 소나무가 탑 서쪽에 있네 一尺孤松在塔西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서로 가지런하지 않구나. 塔高松短不相齊
지금 소나무가 탑보다 낮음을 말하지 마오 莫言此日松低塔
소나무가 자라난 다음 날엔 탑이 도리어 낮아지리니. 松長他時塔反低
영매(詠梅) - 도곡 박종우
천지의 맑은 기운 오늘 다시 돌아오니 乾坤淑氣又今回
석 달의 봄빛을 차례로 재촉하네 九十春光次第催
창밖에 찬 매화 너무 일찍 얻어서 牕外寒梅偏早得
모든 꽃 무심한데 가장 먼저 피었네 百花無意最先開
한편 내암은 1908년(순종 2)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많은 사람의 악평(?)과 달리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국난극복을 위한 우국충정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고, 역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과 함께 우리나라 4대 영웅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내암집』이 있다.
비록 정식 며느리로 들이지는 아니하였지만, 주검을 거두어 400여 년 동안 고혼(孤魂)을 위로해 오고 있는 순천 박문(朴門)의 아름다운 마음은 오랜 세월에 걸쳐 미담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