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화엄사 각황전과 삼불화 또는 장육매

이정웅 2007. 4. 10. 23:08

 삼불화 또는 장육매라 불리는 홍매

 꽃

 계파 성능 스님이 주관하고 숙종이 자금을 지원하여 완성한 각황전

 

한국 불교 천년 성지(聖地) 화엄사는 절 이름으로 보아서는 화엄학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을 것 생각되나 인도(印度) 출신 연기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면서 사명이 높아지고 이어 의상대사가 주석하면서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을 새기는 인연을 맺어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화엄도량으로 자리매김 된 절이 되었다.

나말여초에 풍수지리설의 비조(鼻祖)인 도선국사가 사세를 크게 확장한 데 비해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조에 들어와서는 당우를 부분적으로 확장하는데 그쳤다. 반면에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조에는 오히려 선종의 대본산으로 사격이 승격되면서 한국불교의 맥을 이어 온 특이한 내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불사도 임란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될 때 이 곳 화엄사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건물이 불타고 만다. 따라서 현존 하는 전각들은 거의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이상으로 천년 고찰 화엄사의 연혁을 대충 살펴보는데 그쳤다. 왜냐하면 내가 정작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의 내력이나 화엄학이 우리 불교에 끼친 영향 등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각황전(국보67호) 오른 쪽에 있는 오래 묵은 홍매(紅梅) 한 그루와 지장암 뒤에 있는 늙은 올벚나무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홍매 이야기부터 우선 늘어놓고 보고자 한다.

나는 청년시절에 뱀사골을 출발하여 심원마을과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로 내려 온 적이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등산이 주목적이었던 관계로 절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관심이 없었다. 그 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산청 단속사지의 정당매와 산천재의 남명매를 보러왔다가 하동을 거쳐 화엄사를 찾는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절을 둘러보다가 각황전 옆에 핀 분홍색 홍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다음은 문희갑 전 대구시장이 영호남시도지사회의를 이 곳 경내에 있는 호텔에서 마치고 와 화엄사 원통전 사자탑 옆의 소나무가 참 잘 생겼더구나. 대구에도 그런 좋은 나무를 구해서 심을 수 없겠느냐고 하여 도대체 어떤 나무이기에 시장이 반했을까 하여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실 후자의 방문은 직업상의 일이었던 반면에 전자는 내 개인적인 문제이자 정당매 가지를 몰래 꺾어와 접을 붙여 후계목을 생산하였을 만큼 고매의 종 보존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잊지 못할 곳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운전을 못해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나에게 정시식 회장님의 동행 요청은 날아갈 것 같은 즐거운 일이였다. 다만 시기가 좀 늦어 꽃이 그 때처럼 달려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지고 있을 뿐 여전히 분홍색 꽃이 매달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어 너무 기뻤다. 더 반가운 것은 나무에 내력을 적은 종이를 붙여 놓아 심은 이가 누군지 알게 하였으나 내용을 요약을 해서 그런지 홈 페이지의 내용과 다소 다른 점이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 양자를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 677년(문무왕 17) 의상조사(義湘祖師 625~702)가 2층 4면 7칸의 사방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법당 안에 장육황금입불(丈六黃金立佛)을 모셨으나 언젠가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조선조 후기에 와서 계파 성능(桂波 性能)스님이 장육전 중건의 발원을 세웠다. 어느 날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 나 큰일을 도모하려면 복 있는 화주승(化主僧)을 골라 능력이 있는 시주(施主) 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을 써서 사람을 골라야 하는데 물을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를 담은 항아리를 준비해 물을 담은 항아리에 먼저 손을 넣게 한 후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을 화주승을 삼으라고 했다. 다음날 스님들에게 간밤의 꿈을 이야기하고 항아리를 준비시켰다. 스님들을 불러 모아 차래로 손을 담그고 밀가루가 있는 항아리에 손을 넣게 하였더니 어느 스님도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없었다. 이제 절에서 밥을 짓는 일만 하는 공양주(供養主)스님만 남았다.

모든 스님들이 이 마지막 스님을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손을 넣으니 과연 밀가루가 묻지 않았다. 이 신기(神奇)에 참여했든 모든 스님들이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도 그를 향해 삼배(三拜)를 올리며 축하했다.

이를 지켜보던 계파 성능 스님이 ‘그대가 10년 동안 어려운 일을 묵묵히 맡아한 복력(福力)이 드디어 이적을 나타내게 해 많은 스님들을 물리치고 이일을 주관할 화주승이 되었다. 이는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주인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선택한 것이니 부디 책임을 맡아 나와 더불어 불사를 도모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늘 밥 짓는 일만하든 그로서는 여간 거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이르기를 ‘그대는 걱정을 하지 말라 자고 일어나거든 바로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는 문수보살이 일러 준대로 일주문을 나섰다.

한참을 내려가니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파가 나타났다. 자식도 없는 늙은이로 절에 와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누룽지 따위를 얻어먹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수보살의 말이 생각나 큰 절을 하면서 ‘오 대 시주이시여 장육전을 지어 주소서.’ 하면서 절을 계속하였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생각하였든 노파가 스님의 진지한 태도에 놀라면서 자기의 가난함을 한탄하다가 ‘이 몸 죽어 불사를 이루리라.’하면서 깊은 소(沼)에 몸을 던졌다. 화주승은 이 기이한 장면에 너무 놀라 그길로 멀리 도망을 쳤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한양에 도달했다. 화창한 봄날 궁전 앞을 지나는 데 유모와 같이 밖으로 나왔던 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처음 보았는데도 우리스님이라며 스님의 누더기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 쪽 손을 펴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화주승이 손을 잡았더니 신기하게도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숙종이 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장육전 지을 비용을 하사하였으며 4년 만인 1703년(숙종 29)건물이 완성되자 ‘각황전(角皇展)이라는 현판도 써 주고 선·교 양종 대가람이라 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불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파 성능 스님이 한 그루의 홍매를 심으니 각황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다보불을 상징하여 삼불화(三佛花)라기도 하고, 장육매(丈六梅)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이 홍매는 계파 성능 스님의 깊은 불심과 숙종의 자비로운 마음을 합해 철마다 아름답게 피는 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