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정조와 홍국영 | ||||||||||
이렇게 한손에 권력을 쥐었을 때가 홍국영의 나이 불과 만 28세 때였다. 그를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원조로 보는 시각까지 있을 정도로 홍국영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정사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음지에 있던 서얼들을 등용하는 데 일조했다. 정조는 즉위 후 여러 전문 서적들을 편찬하고자 했으나 전문 인력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서류(庶流:서얼)들을 등용하자는 방안을 낸 인물이 홍국영이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정조 3년(1779) 3월 27일조는 관직 증원을 어렵게 여기던 정조에게 홍국영이 교서관(校書館)의 정원(定員) 4명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돌리자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조실록' 3년 3월 27일조의 “처음으로, 내각(內閣:규장각)에 검서관을 두었는데 서류 가운데 문예(文藝)가 있는 사람으로 차출하여 4원(員)을 두었다”는 기록은 이렇게 나왔던 것이다. 그 두달 후쯤인 6월 초하루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4명의 서얼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된다. 검서관으로 임명되기 전 이들의 생활은 곤궁했다. 이덕무는 유득공이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이틀을 굶고 있었을 정도였다. 장안의 양반 장서가들은 그가 책을 빌리면 꺼리지 않고, “이덕무는 참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라면 어찌 책 구실을 하겠는가”라면서 먼저 빌려줄 정도로 유명한 독서가이자 지식인이었으나 서얼이란 이유로 굶주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되자 4명의 서얼들은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 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했다. 비록 5∼9품에 해당하는 중하위 직급이었지만 이들의 머릿속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였기 때문에 지식계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홍국영은 이런 서얼들을 천거하는 안목도 있었지만 권력자는 그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조실록' 3년 9월조는 홍국영이 “방 안에는 늘 다리가 높은 평상을 두고 맨발로 다리를 뻗고 앉았는데 경재(卿宰:재상)가 다 평상 아래에 가서 절했다”고 전하고 있다. 효의왕후 김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원빈(元嬪)으로 만들고, 원빈이 죽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이담(李湛)을 완풍군(完豊君)으로 삼아 ‘자신의 생질’이라고 불렀다. 홍국영이 이담을 내세워 차기 왕위까지 넘보자 정조는 재위 3년(1779) 9월 전격적으로 홍국영을 실각시켰다. 홍국영이 비록 서얼들을 천거했다고 하지만 이는 정조가 재위 1년(1777)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반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서류소통절목'은 서얼들도 벼슬을 할 수 있게 입법화한 것이었다. '서류소통절목'이 있었기에 규장각 사검서가 등용될 수 있었다. 정조가 성공한 군주가 된 것은 실력은 있으나 이가환·정약용처럼 남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되었던 사대부들은 물론 신분제에 가로막혀 불우하게 지내던 사검서 같은 인재들을 과감하게 발탁했기 때문이다. 신분제의 질곡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이 인사에 감동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력은 있지만 학연·지연 등에 기대지 않아서 불우한 인재들을 등용했다면 민심이 짧은 시간에 식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 한명의 입지전적 인물도 발탁 못한 현 정권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 2008년 03월 31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