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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오는 8일 공식 개관하는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1864~1951) 선생 기념공원. 1992년 착공했으니 17년만이다. 기념공원은 선생의 생가에서 3㎞쯤 떨
(어진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주암호변에 자리잡고 있다. 기념관 설립논의단계부터 지금까지 이 일을 이끌어온 이가 김중채(70·金重采·사진)씨. 서재필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동아시아 출신으로 처음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보성에 있는 동상 모습 그대로 양복 차림에 재킷을 왼팔에 걸친 동상이 다른 300여 세계적인 인물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는 지난 5월 6일 워싱턴 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서재필 선생 동상 제막식 행사에 참석했다. 최근엔 개관식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초청장 명단을 만드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양 보훈처장, 박준영 전남지사, 정종해 보성군수, 성파㈜ 서운석 사장 등 도움을 준 인사를 헤아려 보니 800명이 넘더군요."
그는 "특히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로부터 사료 수집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도 말했다.
기념사업은 1988년 기념사업추진위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선생이 정치가, 언론인, 의사 등 다역을 한 만큼 각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추진위가 3억5000만원을 모금, 민간단체로서 기념관 건립을 도왔다.
기념사업에 매달린 지 올해로 20년째. 2005년 '반쪽 개관'의 아픔을 딛고 정식 문을 여는 만큼 감회는 남다르다. "알수록 흠모의 정이 깊어집니다. 선생의 기념관을 직접 일군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더 커 힘든 줄 모르지요."
서재필 선생은 문덕면 가내마을 외가에서 태어나 6년간 자랐다. 그런 선생과 김 이사장은 '보성' 출신이라는 공통점 외 큰 인연은 없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기념 사업에 매달린 이유가 있다.
"지금은 모두 한글을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가장 혁신적인 발상으로 순 한글로 독립신문을 발간한 인물이 바로 선생이십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망명지 미국에서도 독립을 위해 평생 힘쓰다 1994년에야 유해가 환국돼 국립묘지에 봉안됐습니다. 더욱이 호남에서 국가서훈 1급 독립운동가는 선생이 유일한데, 너무 소홀히 기리는 것 같아 기념사업에 뛰어들게 됐지요."
열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92년 착공했지만, 예산부족 등으로 수 차례 중단됐다가 2004년 2월 완공됐다. 총 공사비는 124억원. 당시 기념사업회는 보성군과 전남도가 운영을 맡길 희망했지만, 연간 10억원에 달하는 운영비가 걸림돌이었다. 그러다 작년 기념관이 국가보훈시설로 지정돼 매년 2000만원을 지원 받고, 전남도도 매년 5000만원을 주기로 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결국 기념사업회가 운영키로 하면서 운영 주체 논란을 매듭지었다.
"이제야 선생을 뵐 면목이 생긴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좋은 일이 주도권 다툼으로 비춰져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많은 아픔이 있었던 만큼, 선생을 기리는데 힘을 모두 쏟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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