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천년의 혼 일깨우자…부인사 고려대장경 관광아이콘으로 키우자

이정웅 2009. 1. 2. 09:54

천년의 혼 일깨우자…부인사 고려대장경 관광아이콘으로 키우자
 우리나라 최초 대장경판…"몽고군 침입때 소실"
 해인사 판본엔 없는 경전 많아 역사적 가치 지녀
 日 남선사 등에 영인본 보관돼 체계적 복원 가능
/박종문기자 kpjm@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판이 봉안됐던 부인사 전경.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부인사 고려대장경을 관광자원화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판이 봉안됐던 부인사 전경.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부인사 고려대장경을 관광자원화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돼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초조대장경)을 살려내자는 움직임이 학계와 대구시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부인사 고려대장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으로 고려 현종 2년(1011)에 시작해 현종 20년(1029)까지 18년 동안 조성돼 부인사에 봉안했으나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2011년이 부인사 대장경 조성 1천년을 맞이하는 해이고,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만큼 이를 문화관광자원화 하자는 것이 논의의 핵심이다. 부인사와 부인사 고려대장경의 역사적·문화적 가치 및 문화관광자원화 방향을 짚어본다.


◆ 부인사 고려대장경의 의미

한마디로 해인사 팔만대장경에 못지않은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국 및 우리나라 대장경판 조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인사 대장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판이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틀어 최초의 대장경판(목재)은 북송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으로 972년부터 983년까지 북송 태조의 칙명으로 완성됐으며 모두 13만매 정도이다. 이 대장경판은 북방 금나라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고려시대 우리나라 대장경은 모두 3차례 있었다. 고려 현종 2년인 서기 1011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판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8년 동안 조성된다. 초조대장경은 주로 북송의 관판대장경을 토대로 조성됐으며, 대구 부인사에 봉안했으나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이 대장경이 바로 부인사 고려대장경이다.

이후 고려는 이 초조대장경에 만족하지 않고 주체적인 대장경 조성을 시도, 문종 때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대장경 조성사업에 착수, 이른바 고려 속장경을 출간한다. 그러나 이 또한 북방 외적의 방화로 소실됐다. 다만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에 남아있는 영인본을 통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16년간에 걸쳐 완성된 것이 소위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정확한 내용과 8만여장에 이르는 방대한 경판의 규모로 30가지 남짓한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최고의 판본으로 인정받는 한국불교의 국보이다.

김윤곤 박사(영남대 명예교수)는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후부터 초기경전 필사본과 권자본(券子本)과 단권(單券) 등이 전국에 산재해 있던 것을 체계화하고 종합화한 것이 부인사 고려대장경이며, 부인사 고려대장경은 해인사 판본에서 볼 수 없는 경전의 이름이 많다는 점 등이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즉 해인사 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오면서 만들어진 경전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1000년전 부인사와 대장경의 미스터리 추적

대구 동구 팔공산 남쪽 중턱에 있는 현재의 부인사(符印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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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의 말사로 현재의 건물은 1930년 초 비구니 허상득 스님이 중창하고, 최근들어 불사가 진행됐다. 지금의 부인사는 아담한 규모이지만 1천년 전에는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경현 박사(경북대 명예교수)는 부인사는 한국 제1의 호국 대가람으로 644년(선덕여왕 즉위 13년)에 선덕여왕이 창건했다면서 세간에는 선덕과 음이 비슷한 성덕대왕으로 와전됐다고 밝히고 있다.

창건 연기는 선덕여왕이 고구려, 백제 양국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라를 구하고 이(二)국을 토멸해 일통삼한을 이루고자 성산영악(聖山靈岳)인 중악(中岳-公山)에 와서 기도발원함에 중악신인 공산도인이 나타나 중악 천왕봉(비로봉) 기슭에 원당(願堂)을 세워 기도 강회(講會)하면 이루리란 계시를 받아 사찰을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부인사는 대가람으로 불렸는데, 고려 명종 10년(1180) 6월에 큰비가 내려 부인사가 있는 북산에서 큰물이 솟구쳐나와 물에 잠기고 떠내려간 절간집이 80여 간이었다고 할 정도이다. 지금 부인사앞 포도밭속에 있는 당간지주 초석은 부석사나 해인사와 비교할만한 것이라고 김윤복 박사는 말한다.

당초 개경 흥왕사에 봉안한 우리나라 최초 대장경판이 언제 부인사에 이장했는지, 실제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는지는 불명확하다는 것이 문경현 박사의 주장이다.

문 박사는 당시 북방에서 일어나는 오랑캐의 침략대비 차원에서 인종 대에 이장한 것으로 추정했다. 나아가 대장경이 불탔다고 하는 1232년 임진년은 몽고군이 소백산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어 고려 사람에 의해 고려대장경이 방화·소실된 가능성을 제기했다. 몽고군 침략으로 인한 약탈, 난리의 무정부 공황상태에서 부인사가 민초들의 약탈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 부인사 대장경 복원

이 땅에서 사라진 부인사 고려대장경은 다행히도 일본 교토 남선사 사찰에 상당부분 영인본이 보관돼 있다. 또 국내 몇몇 박물관에도 영인본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체계적인 복원이 가능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현재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일본 남선사 및 국내 영인본을 토대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대구시에서도 고려대장경연구소와 함께 이를 복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원확보 및 기술적인 문제 등이 변수로 남아있다.


#대장경(大藏經)

대장경은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 즉 삼장을 포함한다. 경장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근본교리이고, 율장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의 조항과 공동 생활상의 규범을 적은 경전이다. 또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대해 스님이나 학자들이 설명논의(說明論議)한 것이다.
2008-12-31 16:49:12 입력
 2011년 세계육상때 대표적 문화행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