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대구의 명동' 향촌동을 아십니까?

이정웅 2009. 10. 22. 22:09

'대구의 명동' 향촌동을 아십니까?
 
 
 
‘서울에는 명동, 부산에는 남포동, 대구에는 향촌동.’

우리나라 도심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역들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이들 지역은 도시의 낮과 밤을 좌우했다. 명동과 남포동이 재개발 과정을 거치며 예전의 명성을 회복해가는 데 비하면 향촌동은 여전히 쇠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향촌동은 재개발이 덜 된 만큼 과거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어 진정한 의미의 도심재창조가 가능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진다.

향촌동은 현재 무궁화백화점 동쪽 길에서 북성로로 이어지는 300m 정도의 거리로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중영(中營)과 대구부가 있던 자리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주요 건물들이 하나 둘 헐리면서 은행, 우체국, 전화국, 헌병대 등이 들어선 경북도청 앞은 낮의 중심지가 되고 바로 옆 향촌동은 요정과 여관, 술집 등이 번성한 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요정과 양주점, 병원과 요릿집, 사진관 등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지금의 무궁화백화점 자리에는 요즘의 대형소매점과 비슷한 중앙염매소가 있었는데 이는 현재 중앙시장의 기원이 된다. 찻집도 많았다. 식산은행 뒤편에 히로코(笠原) 찻집, 식산은행 2층에 남양다방, 해방 직후 향촌동 골목에 백마, 호수, 백록 등이 생겼으며 음악다방으로 녹향이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난민들로 메워져 이후 향촌동의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대구사람들이 ‘시내’라고 부르면서 흥성거린 이곳은 중앙로 건너편 교동으로 서민 상권이 옮겨가고 1966년 경북도청이 북구 산격동으로 옮겨가면서 서서히 시내로서 위풍을 잃게 된다. 도청 부지 일부에 중앙상가가 들어서고 1978년 대보백화점, 1979년 무궁화백화점이 들어서 백화점 상권으로 변모를 시도하지만 동성로와 교동 쪽의 대구백화점과 동아백화점에 밀려 맥을 잃고 말았다.

현재 향촌동은 과거 이곳을 즐겨 찾았던 노년층들의 유흥과 사교 장소가 됐다. 10여곳의 성인텍을 비롯해 노년층들을 고객으로 하는 상점들이 어우러져 있는 가운데 남쪽으로 1970년대부터 형성된 수제화 골목이 묵묵히 장인의 자존심을 유지해가고 있다.

특별취재팀 김재경·서상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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