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나주 사림(士林)의 뿌리 금사정(錦社亭) 동백나무

이정웅 2010. 5. 1. 08:22

 

 동백나무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줄기가 긁고 큰 수령 500여 년의 나주 송죽리 금사정 내 동백나무(천연기념물 제515호)

 줄기

 선비들의 충정처럼 검붉게 핀 동백나무 꽃

 시들어서 떨어지는 다른 꽃에 비해 시들지 않고 떨어지는 비장한 모습의 동백꽃

 동백나무 안내판

 조광조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실현되지 않자 낙향하여 11인 금강계를 조직 훗날을 기약하며 유유자적하던 금사정

 금사정 현판

 

나주 사림(士林)의 뿌리

금사정(錦社亭) 동백나무

 

전라도라는 말이 전주-나주에서 비롯되었듯이 나주는 호남을 대표하는 뿌리 깊은 고장이다. 땅이 넓고 기름지며 수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따라서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많은 문화유산 있어 호남을 깊이 이해하려면 반드시 나주를 찾아야하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노거수가 있어 볼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공산면 상방리의 400여 년 된 호랑가시나무, 봉황면 용곡리의 역시 수령 400여 년의 이팝나무, 산포면 신도리의 800년 된 감나무 등이 그것이지만 전국에서 가장 큰 동백나무(천연기념물 제515호)가 있어 더욱 그렇다.

이들 나무들을 하나하나 살펴 볼 기회를 가지고자 하나, 우선 송죽리 금사정 에 있는 동백나무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대다수의 노거수들은 그가 자라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동백나무는 좀 특별하다.

이야기는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산군의 학정(虐政)으로 국가재정이 파탄 나고 민심이 이반되자 성희안, 박원종 등이 그를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중종이다. 중종은 반정공신의 도움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그들의 의사에 반한 정책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다. 그는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로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과거제도를 개혁하는가 하면,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된 공신들의 훈격 마저 하향조정했다. 초기에는 종중 역시 이런 그의 정치행태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훈구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종 또한 그의 지나친 개혁에 싫증을 내게 되니 마침내 파당을 조직해 국정을 문란케 했다는 죄로 유배 길에 오른다. 이 때 그를 지지했던 많은 선비들과 성균관에서 공부하든 학생들까지 부당함을 호소하는 농성(籠城)에 참가하게 된다.

나주 출신의 일단의 선비들 역시 상경(上京)해서 그들의 농성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폭력으로 강제해산을 하게 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고 만다. 경치가 아름다운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왕곡면 송죽리에 금사정을 짓고 훗날을 기약하며 11인금강계(錦江契)를 조직 학문을 연마하고 때로는 풍류를 즐기며 세상을 보냈다.

이 때 늘 꽃이 붉은 4계절 푸른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으니 소위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천연기념물 제515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고, 크며 숲을 제외하고 단 한 그루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유일한 나무다.

계원의 면면은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일반적으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구분

이름

본관

비고

생원

정문손(鄭文孫)

하동인

*생원 : 생원시험에 합격한 분으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된 사람

유학

김두(金豆+斗)

당악인

*유학 : 아직 관직을 얻지 못한 양반

사예(司藝)

나일손(羅逸孫)

나주인

*사예 : 성균관 소속 정4품

유학

김안복(金安福)

김해인

유학

진세공(陳世恭)

여양인

유학

진이손(陳二孫)

여양인

유학

진삼손(陳三孫)

여양인

생원

김식(金軾)

광산인

우후(虞侯)

김구(金臼)

당악인

*우후 : 각도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

*1510년(중종 5)생원 인종 대 무과 급제

정자(正字)

임붕(林鵬)

나주인

*정자 : 홍문관 등에 소속된 정9품

*1510년(중종 5)생원,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 200명을 거느리고 궐문 밖에 나아가 조광조의 억울함을 호소

1521년(중종 16) 문과 급제 병조좌랑, 경상도부사, 좌승지, 경주부윤, 전라, 충청병사를 거쳐 광주목사 재임 중 병사

호는 귀래정

유학

정호(鄭虎)

금성인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계원(契員) 중에는 이미 관료로 진출한 분도 있고 학업을 연마 중인 사람도 있었으며, 성씨별로도 8개 명문이 참가해 당시 나주지역의 엘리트들인 사림(士林)들이 총망라 된 것 같다. 계이름 금강(錦江)은 당시 영산강이름이라고 한다.

생태관광이 활성화 되면 이런 노거수들은 귀중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

왕곡면 송죽리에 있지만 공산면에서 택시로 접근하면 더 수월하다. 토박이인 기사도 물어물어 찾을 만큼 홍보가 부족하다. 입구 어디쯤에 큰 간판을 세워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