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선무원종1등공신 구암 오득린이 전쟁이 끝난 후 마을을 개척하면서 심었다는 호랑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꽃, 이 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에 빨간 열매가 수없이 달린다고 한다.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안내판, 그러나 호랑가시는 호랑이가 등이 가려울 때 문질러 이름이 유래된 것이 아니고 잎의 끝이 호랑이 발톱같이 날카롭게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평화로운 상구마을 왼쪽의 숲이 오득린장군이 호랑가시나무와 함께 심은 나무들이라고 한다.
골고루 잘 뻗은 호랑가시나무 줄기
나주인 구암(龜巖) 오득린(吳得隣)장군과
상구마을 호랑가시나무
나주시 공산면 상구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호랑가시나무(천연기념물 제516호)가 있다. 임란 시 이순신장군의 참모로 크게 활약한 원종1등공신(原從一等功臣) 구암(龜巖) 오득린(吳得隣, 1564~1637)이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분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재 신채호가 지은 <조선위인전>에 ‘지략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이순신이 막부에 보냈다’라는 것 외 어느 곳에서도 그 분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주시청은 물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홈페이지 ‘역사 속의 인물’과 ‘역사와 인물’편에도 없었다. 시청에 편지를 보냈더니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었지만 인물을 살펴봄에 있어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몰(生沒) 연도가 없었다. 그러나 이 회신 문을 통해 공의 본관이 나주(羅州)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나주오씨대종회>홈페이지에 들어가 더 자세히 알아 보려했지만 일부 내용만 열람하지 못하도록 해 놓은 다른 문중의 홈페이지와 달리 나주오씨가 아니면 로그인이 불가능하도록 해놓아 접근이 불가했다.
4월도 저물어 가는 25일 첫차로 대구를 출발, 나주에 닿았다. 나주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재작년 완사천(전남 기념물 제93호)을 찾은 일이 있었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로맨스의 무대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것도 그렇지만 나무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왕건에게 물을 떠 주면서 체하지 않게 잎을 따서 넣어주었다는 버드나무가 도대체 무슨 수종일까 하는 것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과 수양버들이었다.
터미널에 내려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에게 180-1번 버스를 타고 공산면 소재지에 내려 택시를 타고 상구마을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불안도 함께한다. 차장 밖으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하얀 배꽃 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으나 마음 놓고 바깥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00동이고 다음내릴 곳은 00동입니다.’라고 하여 목적지를 두 번 가르쳐 주는 대구 시내버스의 안내방송과 달리 이곳 버스는 다음 내릴 곳만 가르쳐 주어 잠깐 한 눈 파는 사이 목적지를 놓쳐 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호랑가시나무는 상구마을 초입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마음으로 그렸던 것보다 크고 수형도 좋았다. 수식자 오득린공의 기념비도 함께 있었다.
공은 1564년(명종 19)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아우와 함께 창의했다. 공의 병법과 재능을 높이 사고 있던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이 추천하여 충무공 막하(幕下)로 들어가 옥포, 당포, 명량, 노량 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면서 충무공을 보좌해 큰 공을 세웠다. 공은 충무공이 모함을 받아 옥중에 있을 때에도 훗날 그가 풀려날 것을 대비해 해남, 진도, 영암을 오가며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목포에 노적봉을 쌓고 강강수월래를 가르쳐 뒷날 있을 전쟁을 위해 기반을 조성해 놓았다. 명량대첩에도 크게 활약했다. 전쟁 말년 철군을 서두르든 왜장(倭將)이 명(明)나라 장수 진린(陳璘)에게 퇴로를 열어 줄 것을 요구하며 뇌물을 주고 진린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 충무공에게 보고하여 이를 저지케 하여 적을 추격 대파시켰다.
충무공이 적의 흉탄을 맞아 목숨이 위급할 때 조카 완(莞)을 불러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고 오득린에게 나를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도록 하라’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그를 충무공에 추천했던 구봉과 아우도 전사했다. 공 역시 적의 총탄으로 불구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 후 있었던 논공행상에서 공이 누락되었다. 송희립(宋希立) 상소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서훈되고 통정대부 장악원(掌樂院) 정(正)에 제수되었다. 1637년(인조 15)년 향년 74 세로 돌아가시니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왼쪽, 마을의 허한 부분을 비보하기 위해 함께 심었다는 다른 나무들도 이제 막 새잎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않는 뒷산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몹시 평화로워보였다.
사진을 몇 컷 찍자 의아했는지 한 분이 나오셔서 뭣 하느냐고 물었다. 방손(傍孫)인 영선씨였다. 지나가던 직계 후손을 소개해 주어 실기나 행장이 있으면 보내 달라고 주소를 적어 주었다.
200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공(公)의 온기가 남아있는 나무인 만큼 후손은 물론 나라가 잘 가꾸어야할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공신(功臣)이자 지역을 빛낸 인물인 만큼 나주시청의 ‘역사 속의 인물, 편에도 반드시 등재하여 공을 현창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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