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화산 정대영선생과 함양 목현리 구송

이정웅 2010. 4. 10. 17:17

 

 화산 정대영선생이 심었다는 구송(천연기념물 제358호) 줄기가 9개로 뻗어 구송(九松)이라고 했다고 하나 지금은 7개만 남았다.

 구송의 뿌리 부분 , 높이 50센티미터 정도에서 줄기가 갈라졌다.

 수피가 붉은 전형적인 소나무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으며 수세도 양호하다.

 화산 정대영선생의 실기

 화산 정대영선생 유허지에 세워진 비석, 여늬 비석과 달리 9면으로 제작되었으며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었다.

 화산공이 태어나고 자란 목현마을

 

화산 정대영선생과 함양 목현리 구송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실감했던 해가 올 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온이 낮고 비가 자주 왔다. 따라서 일조량부족과 저온으로 시설채소 값이 오르고, 봄꽃의 개화마저 늦어졌다. 그러나 대 자연의 법칙은 예외가 없는지 비록 늦긴 했어도 대지는 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동안 별러왔던 함양의 구송(九松, 천연기념물 제358호)이 보고 싶었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민들레가 피고, 먼 산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여럿이 갈려니 나만 나무를 좋아할 뿐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않으니 동행할 사람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친구가 많아야 노년이 외롭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면에서 실패한 나는 이럴 경우에 더욱 난감해진다. 묘안으로 떠 오른 것이 구송을 심은 사람이 진양정씨라는 점과 평소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늘 따뜻한 말로 나를 대해주던 정(鄭)군과 정군과도 잘 어울리며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준 엄(嚴)군이었다.

정군에게 전화하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느닷없이 먼저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선약이 있어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토, 일 양 일 중 함양 쪽으로 나들이하려고 하는데 형편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현업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모 대학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엄군의 비번(非番)이 되는 일요일이 좋다고 했다. 그동안 서로 적조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생각하는 마음이 동한 것에 놀랐다. 이런 것을 두고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건가?

날씨마저 화창했다. 세 사람은 함양으로 향했다. 나만 뚜렷한 목적이 있을 뿐 동행한 두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죽은 늦둥이를 잊지 못해 심었다는 함양초등학교 교정의 느티나무와 고운 최치원선생이 태수로 있으며 물난리로부터 함양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상림을 보고 목적지 휴천면 목현리로 행했다.

구송은 나무로서는 최상위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가가 보호 관리하는 명목(名木)이다. 그러나 각종 자료에는 진양정씨 목현리 입향 선대(先代) 화산공이 심었다고 할 뿐 화산공이 어느 분을 지칭하는지 기록되어있지 않았다. 이런 명목을 남긴 분이라면 적어도 그분의 이름이라도 후세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명기해 놓는 것이 예의일터인 데 하는 아쉬움이 들어 군(郡)에 편지를 보내 문의했으나 답장이 없었다. 문화원에 다시 전화를 걸어 마침내 후손인 정종만님과 연락이 닿았다.

미리 약속한대로 종만님은 화산공의 실기를 들고 현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화산공을 학산공으로 써 놓아 문화유산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의 무성의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높이 15m, 가지가 9개(현재는 7개),수관 폭이 20m, 수령 270년 정도라고 알려진 잘생긴 이 나무는 화산(華山) 정대영(鄭大永)이 심었다고 한다. 그는 1838년(헌종 4)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문자를 가르치면 잊지 않았다고 한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니 어른처럼 법도를 쫓아 상례를 치르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으며, 어머니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애도하고 시묘살이를 한 효자였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니 명성이 널리 알려지며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향약계(鄕約契)를 조직하여 향장(鄕長)으로 활동하면서 예법과 경전을 강의하여 주민 교화에도 힘썼다. 이 때 마을 앞 냇가에 구간송(九幹松) 즉 줄기가 아홉 개로 뻗은 소나무를 심고 소요자적하며 풍류를 즐겼으며 나무 아래 대(坮)를 쌓아 구송대(九松坮)라 하였다. 평생을 성리학 탐구와 후진양성에만 매달리다가 1903년(고종 40) 66세로 돌아가셨다.

진양정씨가 함양에 자리 잡은 것은 조선전기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부터라고 한다. 선생은 1488년(성종 19)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태종이 남해현을 설치하고 인근에 거주하는 팔대성(八大姓)을 남해로 옮겨 살도록 했는데 할아버지 정확(鄭確)이 교수직으로 들어가 그 곳을 주민들을 가르치며 대를 이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때인 1504년(연산군 4) 함양의 명문 나주박씨로 원종공신인 춘당 박맹지(朴孟智, 1426~1492)선생의 손녀와 혼인하고 수동면 당곡으로 이거(移居)했다. 까닭을 두고 학문을 더 배우기 위해서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처향에 살기 위해서 라는 두 설이 있다. 그러나 당시 함양에 크게 이름 난 선비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후자가 맞는 것 같다.

병란과 후손들의 부주의로 그의 많은 저술이 산실(散失)되어 학자로서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후학 중 노진(盧禛, 1518~1578),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양희(梁喜, 1515~1580) 소세양(蘇世讓 ,1486~1562), 강익(姜翼,1523~1567), 오건(吳健, 1521~1574), 임희무(林希茂, 1527~1577), 변사정(邊士貞, 1529~1596), 정복현(鄭復縣), 노관(盧祼), 우적(禹績), 조식(曺湜), 양홍택(梁弘澤), 정지(鄭摯)등 고위 관료와 의병장, 학자 등 기라성 같은 인물을 배출함으로 함양 문풍 진작에 크게 기여하고 1547년(명종 2) 향년 60 세로 돌아가셨다. 한 스승 밑에 대과 급제자 한 두 사람만 배출되어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데 대과는 물론 판서와 그 외 여러 직급의 관료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다 하겠는가. 특히 남인 예학의 대가이자 영남학을 기호지방까지 확산시키고 조선후기 실학사상이 태동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 한강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이 초기 학문을 배웠던 던 덕계 오건선생이 당곡의 제자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새로 알 수 있었다.

구송을 심은 화산 정대영 역시 당곡의 핏줄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동행한 친구 정군의 지적처럼 화산공이 20대에 심었다고 하더라도 나무 나이는 15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설사 20년생을 심었다고 하더라도 170년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수령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화산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에 세워진 기념비를 보고 다시 함양읍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