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00여 년 전 단곡 곽진이 심은 은행나무
단곡, 피막마을 유래비
은행나무옆에 세운 행루정
단곡이 3대에 걸쳐 원장으로 있었던 소수서원 강당
보호수표지석
현풍인 단곡 곽진과 영주 단곡리 은행나무
국립공원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영주시 단산면은 시골의 한적한 면(面)에 불과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전국적인 이슈를 낳았다.
첫째는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포도산지라는 점이고, 둘째는 면 이름 단산(丹山)을 소백산면(小白山面)으로 바꾸려다가 같은 소백산권역인 이웃 단양군의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소백산 남쪽에 있으니 차라리 ‘소백산남면’이라고 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두러보고 부석사로 가다 보면 길 바로 옆에 큰 은행나무가 서 있는 ‘단곡(丹谷), 진막(陣幕)’이라는 마을이 있다.
앞산은 병장산(兵藏山)이고 마을은 진막(陳幕)인데 고려와 신라가 싸울 때 진막(즉 軍營)을 친 곳이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 단곡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명종 시 영남오현의 한 분으로 3대에 걸쳐 소수서원 원장을 지낸 단곡(丹谷) 곽진(郭 山+晉, 1568~1633)이 이곳에 정착하여 그의 호를 따랐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은행나무는 그가 심은 것으로 전해온다.
그러나 고려와 신라가 싸울 때 진막을 처서 진막이라고 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라는 싸우지도 아니하고 나라를 고려에 바쳤기 때문이다. 고려가 아니고 고구려가 아닌가 한다. 실제로 삼국시대 초기의 영주는 물론 더 남쪽 지방까지 고구려가 차지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본관이 대구 현풍인 곽씨들이 영주일대에 정착한 것은 단곡의 아버지 생원 한(澣)때부터라고 한다. 판관을 지낸 할아버지 자보(子保)가 처의 고향인 봉화현으로 와서 살다가 아버지가 풍기 고로촌(古老村)에 옮겼으며, 출세의 뜻이 없었던 공이 소백산 아래 진막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공은 호가 단곡(丹谷)으로 아버지 한과 어머니 평해황씨(平海黃氏) 참봉 언량(彦良)의 딸 사이에 1568년(명종 23)에 태어났다.
광해군의 스승이었던 송소 권우(權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을 읽고 그의 둘째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면서<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등을 취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깊이 빠졌다. 1605년(선조 38)에 광릉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곧 물러났다.
1618년(광해군 10) 아들 영(瓔)이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참형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투옥되어 죽자, 1621년(광해군 13)에는 그 자신이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써 올렸다.
당시 집권층이 공을 비난한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적 곽영을 보건데 그가 나고 자란 곳은 풍기인데 풍기는 바로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의 처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의 아비인 곽진은 마치 노예처럼 영경의 문에 드나들었는데 그 역시 영경의 조카인 황유중, 황유첨 형제와 친형제 이상으로 절친하게 지내면서 영경을 위해 복수할 음모를 밤낮으로 꾸몄다.’ 라고 했다.
유영경은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사람으로 소북파의 영수로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과 맞선 인물이다. 따라서 이이첨의 전횡을 반대하는 단곡으로서는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두고 실록은 ‘마치 노예처럼 영경의 문을 드나들었다’고 비하했다.
시문에 능했으며, 장현광·이준·정경세 등과 사우관계를 맺었다. 1633년(인조 11)생을 마감했다. 백고리사(白皐里祠)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단곡문집> 3책이 있다.
공은 학문이 높고 몸가짐이 단정하며, 근엄하여 원근에서 배우고자하는 사람이 많아 문도가 70여 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수서원 원장을 하면서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산실되었던 장서(藏書)를 되찾고, 서원 내에 꽃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환경을 아름답게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은거했다는 곳의 지명만 ‘단곡’으로 남아 있을 뿐 마을에는 한 가구의 후손도 없었다. 따라서 지금 공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수령 500여 년의 은행나무뿐이다. 이런 점에서 누군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려고 한다면 거창한 빗돌을 세우기보다 나무를 심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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