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박승임이 심은 향나무, 한 때 타고다니든 말을 매는 곳이었다고 한다
삼락당의 원래 이름은 여름에도 시원해 하한정(夏寒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수박물관이 발간한 '대를 잇는 선비정신 소고가 사람들'
소고 선생 국역본 문집 (한국국학진흥원)
삼락당 전면 모습
반남인 소고 박승임과 영주 삼락당 향나무
경북 북부지방의 영주가 뜨고 있다. 국립공원 소백산과 아름다운 계곡 죽계가 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지역의 자연과 인문자산을 잘 조화시켜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성과물이 바로 한국관광공사로부터 2년 연속 한국 관광의 별로 ‘소백산 자락길(2011)’과 ‘선비촌(2012)’ 선정되는 경사이다.
특히, 영주는 고려조부터 안향 등 많은 선비를 배출했는데 조선전기의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도 그 중 한분이다.
공의 본관은 반남(潘南, 전남 나주시 반남면)이다. 시조 박응주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서 215명의 문과급제자, 정승 7, 대제학 2, 공신 5, 호당에 뽑힌 분이 6, 문묘에 배향된 분 1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들이 영주에 자리 잡은 것은 소고의 할아버지 박숙이 고모부인 이중(李重)이 안동부사로 올 때 같이 내려와서 능성구씨 집안에 장가들어 처의 고향인 안동에 정착했다가 아버지 박형(朴珩)이 영주의 예안김씨와 혼인을 하여 그 역시 처의 고향인 영주에 자리 잡음으로 비롯되었다. 이때가 1500년대이다.
퇴계문하에서 수학하여 1540년(중종 35) 24세로 셋째형 승간(承侃)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스승인 퇴계와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하였다.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충언을 담은 1만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명망이 세상을 떨치자 세도가인 소윤 윤원형이 심복을 보내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 뒤 소윤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그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 복(服)을 벗은 뒤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명종 12) 직강을 거쳐 사예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하여 벼슬에서 은퇴, 두문불출로 독서에 힘썼다. 그 이듬해 고향인 풍기군수로 다시 임명되어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의 낡은 영정을 새로 그리게 하고, 호조에 건의해 재정을 충실히 했다.
그 후 군자감정에 임명되었고, 1565년(명종 20)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그 이듬해 동부승지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뒤 진주목사로 나아갔다.
1569년(선조 2)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선조 4)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좌승지에 임명되고, 1573년(선조 6) 도승지에 승진되었으며, 다음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경주 일대의 묵는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는 한편,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576년(선조 9)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선조 14) 춘천부사에 나아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선조 16)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 창원부사로 좌천, 얼마 뒤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고 많은 서적을 읽었으며, 특히 <논어>와 주자서를 탐독하여 스승인 이황에게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김륵 등 60여 명의 후학을 배출하였으며 그 중 9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 구강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그 후 훼철되었다)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성리유선 性理類選>·<공문심법유취 孔門心法類聚>·<강목심법 綱目心法> 등과, 문집인 <소고문집>이 있다.
영주시 문정동 한정마을에는 삼락당(三樂堂)이 있다. 소고의 손자 삼락당 박종무를 기리는 곳이나 원래는 소고의 아들 취수헌 박록(朴漉)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소고가 번잡한 곳을 피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하여 하한정(夏寒亭)이라 명했다고 한다.
그 앞에는 공이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가든 1571년(선조 4) 심고 급제 후 유가할 때 깃발(장대)을 꽂고, 타고 다니든 말을 매어두기도 했다는 향나무가 있다. 처 삼촌이자 대동운부군옥의 저자 권문해의 조부인 권오상이 무오사화로 강진 유배 중일 때 현지의 선원들이 울릉도에서 가져온 3그루 중 한 그루로 보인다. 일설에는 권오상이 울릉도에 유배되었을 때 가져왔다고 하나 울릉도는 유배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울릉도 유배설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수령이 450 여년정도로 추정된다. 후손 박찬우(전 대구동성로번영회장)님의 제보에 따라 현장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나무 위를 지나가는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상단부분을 계속 잘랐던 것 같다. 생명문화유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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