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영부인 육영수여사와 대구 영남이공대학교정의 전나무

이정웅 2013. 1. 5. 20:48

 

 

 1972년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심은 전나무

 1950년 12월 12일 신랑 박정희 중령과 신부  육영수가 결혼식을 올린 계산성당

 영부인 기념식수 표지석

 결혼 기념사진

 생전의 영부인 모습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사범시절 배고품을 잊기 위해 점심시간 나팔을 불었다는 수양버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기술인의 탑 (영남이공대학)

 

영부인 육영수여사와 대구 영남이공대학교정의 전나무

 

 

 

영남이공대학교 교정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72년 4월 12일 심은 전나무가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영부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내이자 민주화 이후 치러진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유일하게 과반이상을 득표한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자의 어머니이다.

충북 옥천 출신인 영부인이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0년도 저물어가는 12월 12일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전쟁 중이었다.

이 때 계산성당에서 한 쌍의 신랑신부가 허억 대구시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으니 신랑은 조국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대통령이었고 신부는 영부인이 된 육영수여사였다. 전쟁 중이라 미처 주례를 찾아보지 못해 이름만 알고 있던 허 시장은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고 불러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당시 신랑은 34세 육군 중령으로 9사단 참모장이었고, 신부는 26세 아리따운 처녀였다.

대구시 삼덕동 1 가 5-2번지(현 쇼핑몰 몰디비 코리아)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여 2년 후 1952년 박근혜 당선자가 태어났다.

두 분이 처음 만난 곳은 피난지 부산으로 영도다리 옆 한 음식점이었다고 한다. 신부의 이종 6촌 오빠이자 신랑의 대구사범학교의 1년 후배인 송재천씨가 중매였다고 한다.

 

영부인은 아버지 육종관(陸鍾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에서 1925년 태어났다. 옥천의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나 그 해 12월 대구에서 혼인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장군이 5.16 군사 혁명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陽地會)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으며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 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까지 일일이 순방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文世光)에 저격당하여 서거하시니 향년 49세 한창 일할 나이였다.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영결식이 8월19일 오전10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백일탈상 하루 전인 1974년 11월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추모책자를 펴냈다. (자료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대구에는 육영수 여사가 심은 나무와는 달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 된 또 다른 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대구사범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고등학교 교정의 수양버들이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상급학교는 등록금이 면제되는 대구사범 이외 달리 다른 학교가 없었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은 기숙사비는 물론 도시락을 싸기 조차 어려웠다. 그에게는 점심시간이 가장 괴로웠다. 종이 울리면 기숙사로 달려가 트럼펫을 가지고 밖으로 나와 운동장 서쪽 편에 있는 수양버들나무 밑으로 가서 배 고품을 잊기 위해 나팔을 불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수양버들을 박정희나무라고 했다.

영부인 육 여사가 심은 나무는 표지석을 설치하고 회양목으로 울타리를 처서 보호하는 등 대학이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억이 깃든 이 나무는 팻말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