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제의 유민이 심은 일본 최고령의 대마도 은행나무
수령이 1200~1500년 이라고 한다.
일본 최고 수령이라는 안내판
은행나무 유주
한글 안내판
일본어 안내판
드물게 보이는 소나무
신사에 심어진 해송
일본 최고령의 대마도 백제(百濟) 은행나무
짧은 대마도여행(1박 2일)이었지만 두 가지만은 좀 챙겨보고 싶었다. 첫째는 그곳에 남아있는 임진왜란의 흔적이고 둘째는 우리나라와 다른 다양한 식물이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다 실패(?)했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였던 오우라(大浦)항을 찾아보지 못하고, 난대식물에 대한 지식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사안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이유는 올해가 임란 발발 420주년이라는 점이고, 이국의 식생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돌이켜보면 임진왜란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주었다. 그것도 백성들의 잘 못이라기보다는 집권층의 무방비로 빚어진 비극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700만(혹은 800만이라고도 한다)명이었다고 한다. 4분의 1에 해당하는 무려 200여만 명이 전사, 병사 또는 굶어죽었고, 10만 여명이 포로로 끌려간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전쟁의 조짐이 있었으나 국방을 게을리 하고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며 임금(선조)은 나라와 백성을 돌보지 아니하고 피난길에 올랐다. 또한 장수들은 적을 방어하기는커녕 도주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나마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내걸고 구국에 앞장섰던 의병들이었다. 이러한 참극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각오가 필요한데도 정부와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잊혀 진 역사였다. 이런 점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조선 출정군 15만 8천여 명을 대기시켰던 오우라항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고 그나마 해상자위대의 기지가 있어 개방이 안 된다고 한다.
올해는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기에 아쉬움은 더 컸다. 지금의 정국을 보면 420년이 지난 그때보다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고 향후 5년 동안 국정을 책임지고자하는 후보들은 국가의 미래를 제시하기보다 온갖 복지정책을 내걸고 인기영합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런 점이 산업화를 이끈 세대로서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 감회를 오우라항에서 맞고 싶었다.
두 번째 관심사였던 식물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양한 난대식물을 만날 수 있었음은 물론 일본의 대표 수종인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눈이 아플 정도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약 300만 년 전 한반도와 연결되었다가 1만여 년 전 빙하기의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져 일본과 우리나라가 분리되었다는 지질학자들의 연구와 같이 우리나라의 울릉도나 제주도에 자생하는 식물도 많았다.
다만 대마도 고유종이라는 ‘현해진달래’,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마도가 원산지라는 꽃잎이 황색인 ‘참나리’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또한 대구 남구의 구화이자 앞산이 자생지로 알려진 이팝나무가 이곳 와니우라에 3,000그루가 자생하고 있다고 하여 충격을 받았다.
여행 중 받은 전화에서 홍성천(경대 명예교수) 박사가 혹시 소나무가 보이면 사진을 찍어왔으면 좋겠다고 하여 찾았으나 이즈하라의 분국사 경내와 가정 정원에 심은 것 이외는 보지 못했다. 여행하는 곳이 산이 아니고 관광지이다 보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송은 와타즈미신사를 비롯하여 몇 군데 심어져 있는 것을, 이즈하라시를 상징하는 수목이 오동나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오동나무는 조선침략을 주도한 풍신수길 가(家)의 문장(紋章)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전망대부근에서 줄기가 황색인 대나무가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분경(盆景)용으로 귀하게 쓰이는 석창포가 좁은 도랑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것 역시 특이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수령이 1200~1,500년이나 된 백제 사람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였다. 높이 23m 둘레 12.5m로 나이로는 일본에서 첫 번째, 크기로는 두 번째이며 대마도의 고문서에서도 ‘바다에서 보면 산과 같다.’라고 했다고 한다.
1798년 벼락을 맞아 나무속이 불타면서 가지가 부러지고, 1950년 태풍으로 또 다시 줄기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맞았으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도 자람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하고 663년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잃은 나라를 되찾고자 부흥군을 이끌고 백강 해전에서 다시 패하면서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중 일부가 대마도에 정착, 성(城)을 쌓은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 때 고국 백제를 떠나올 때 가져와서 심은 것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망국의 한이 서린 나무이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우리의 손에 의해 심어졌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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