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 의병장을 역임했던 호수 정세아가 죽은 동료들을 추모하기 위해 심은 향나무
호수 정세악 종택
호수 종택 안채
향나무 가지
호수 종택 안내판
호수종택 현판
영남지방에서는 예외적으로 工자형으로 지은 종택
의병장 정세아와 영천 대전리 호수종택 향나무
나무를 보러 가는 길 곳곳에 영천경마공원이 국책사업으로 선정되었음을 축하하는 현수목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영천하면 생각나는 우스개 한 가지가 ‘영천 대말 0’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한다. 즉 영천 사람은 인심이 좋아 되와 말(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도량형기)로 곡식을 담아 팔 때 넉넉하게 즉 좋게 담아 준다는 말로 ‘영천에서는 되와 말이 좋다’라는 뜻인데 잘 못 전해 졌다고 한다.
영남지방에서는 특이하게 공(工)자형으로 지어진 대전리 호수종택(경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은 해남 현감을 지낸 정세아의 장손 정호례(鄭好禮)가 1613년(광해군 5)에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 곳 밭 가운데에 우뚝 솟은 큰 향나무가 있다. 의병장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가 임란 중 같이 싸우다가 전사한 동지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즉 비목(碑木)인 셈이다.
공은 1535년 (중종 30)영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자기 수양과 후학을 기르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래 없는 왜란은 공을 한가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왜군이 영천성을 무너뜨리고 서울로 진격하자 왕이 피난길에 나서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영천에서는 권응수, 정대임, 김응택, 최응사 등 뜻있는 선비들이 창의하는데 공 역시 아들 의번(宜藩), 안번(安藩), 수번(守藩)과 9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나라 구하기에 앞장섰다.
신령의 박연(朴淵)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경주에서 관군(官軍)과 더불어 언양에서 올라오는 적 400여 명을 혹은 참살하고 혹은 격퇴했다. 영천성 수복 전투에서도 역시 큰 공을 세웠다.
박진, 권응수, 정대임 등과 경주성 탈환전에 참가한 공은 아들 의번과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박진의 부대와 합세, 친히 선봉장이 되어 혈전을 벌였다.
그때 적의 기습으로 절도사의 군사가 무너지고 공의 의병만 고군분투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마침내 적을 몰아내고 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아들 의번은 공이 적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 포위망을 뚫었고, 공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번은 공의 탈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면서 계속 공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부친을 구하기 위해 세 차례나 포위망을 드나들면서, 몸은 적의 총칼로 만신창이가 된 채 계속 싸우다가 탔던 말이 총알에 맞아 포위당하게 되고, 결국 휘하 장사 10여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의번이 마지막 적진에 뛰어들 때 같이 참전했던 종 억수(億壽)에게 ‘군사가 패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전사한 줄 알았음) 나는 장차 도적들의 손에 죽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너는 따를 필요가 없으니 집으로 가거라’ 고 종용했다.
그러나 억수는 울면서 ‘주인과 종의 의리가 군신이나 부자의 의리와 같다고 압니다. 이제 주인이 죽기를 결심하는데 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 후 의번의 시신을 찾지 못한 공은 시신 대신 그가 남긴 시와 친구들이 쓴 만사와 제문을 모아 입던 의복과 함께 관에 넣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 무덤을 시총(詩塚)이라 한다. 그 아래에 함께 죽은 억수의 무덤이 있으며 주인과 함께 묘제사상을 받는다.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자 공은 군사를 조희익에게 맡기고 자양으로 돌아가 은둔했다. 체찰사 이원익이 여러 번 천거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선무원종3등 공신에 책록되고, 1612년(광해군 4)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호수실기》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한 집안에 한 사람이 창의해도 나라로부터 칭찬을 받을 일인데 4부자가 함께 창의했을 뿐 아니라,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데도 자기 일신보다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전사한 의번은 나중에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신·효자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안번과 수번은 영남충의단에 제향 되었다.
특히, 주인의 가혹한 학대를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왜군의 앞잡이가 된 종들이 허다했던 시대에 억수가 주인과 함께 전사한 것은 아랫것들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감쌌기 때문일 것이다.
여느 노거수와 달리 우국충정이 녹아 있는 나무인 만큼 적어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그냥 보호수로 머물러 있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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